경찰이 피해자에 사진 한장만 제시
용의자 여러명 보여주는 절차 무시
법정 증인 거부로 진술도 인정 안돼
대법원, 유죄 1심 뒤집은 원심 확정
용의자 사진만 보고 성희롱범으로 지목한 여중생의 경찰 진술은 유죄 증거가 될 수 있을까. 1심 재판부는 이를 증거로 인정해 유죄를 선고했지만, 2ㆍ3심은 인정하지 않아 30대 피고인이 무죄로 풀려났다. 죄는 있는데 죄인은 없는 이 사건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경찰의 용의자 지목 과정의 허점, 영상녹화 진술이 이뤄지지 못한 점, 피해자의 법정 진술 거부 등이 결합된 결과이다. 미성년 피해자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은 채 법리만 따진다는 비판도 없지는 않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2013년 7월 집에 가던 중학생 A양을 따라가 집 앞에서 자신의 바지에 손을 넣어 성기를 만지며 “너희 집 알았으니 다음에 또 보자”고 말한 혐의(아동복지법 위반)로 기소된 윤모(32)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일 밝혔다. 앞서 윤씨는 1심에서 징역 6월이 선고됐으나 2심에서 뒤집혀 무죄가 선고됐다.
우선 경찰이 용의자를 특정하는 과정이 문제가 됐다. 항소심 판결문에 따르면, 경찰은 사건 발생 두 달 후에야 A양을 불러 윤씨의 운전면허증 사진 한 장만 제시했고, A양이 윤씨를 지목하자 범인으로 결론 냈다. 윤씨는 동종전과로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범인 식별 절차에서 용의자 한 사람의 사진만 목격자에게 제시하는 것은 사진상의 인물이 범인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무의식적 암시를 목격자에게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수사기관이 목격자로부터 용의자를 식별하게 할 때는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여러 명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확립된 판례이다. 특히 윤씨는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용의자 특정 절차를 따지는 것은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주인공과 같은 사법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사기관은 사전에 A양의 진술을 영상녹화 하지 못해, 증거로 제출하지 못했다. A양 어머니는 경찰 조사를 한번 받은 딸에게 다시는 수사기관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결국 증거는 경찰에서 한 차례 진행된 피해자 진술 조서뿐이었다. 1심 재판부는 A양에게 4번의 증인 소환장을 송달했으나 시험 준비나 학업, 불안감 등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 검찰도 A양의 어머니에게 수 차례 전화해 출석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으며, 구인장도 신청하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나이와 피해 내용 등을 고려할 때 법정 진술을 위해 구인절차까지 거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경찰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경찰의 용의자 특정과정의 문제점, A양에 대한 구인이 집행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윤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진술조서는 작성자가 법정에 나와 인정해야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진술자가 사망 혹은 기억상실 상태이거나, 법정에서 증언거부권을 행사한 경우, 구인을 명했으나 끝내 구인이 집행되지 않은 경우 등에는 증거로 인정된다.
하지만 무죄판단이 나오기까지 달라진 사법 현실도 일부 작용한 측면도 없지 않다. 성범죄 관련 형량이 높아지고 공판중심주의가 자리잡으면서 법정에서 증거관계를 더욱 엄격하게 따질 수밖에 없게 된 때문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범죄 사건 피해자가 법정 진술을 꺼릴 경우 수사기관의 영상녹화진술이 있으면, 피해자를 법정에 출석시키지 않은 상태에서도 유죄 판단을 하는 경우가 있다”며 “피해자가 법원에 오면 피고인을 퇴정시킨 가운데 별도의 방에서 재판정과 연결해 증언하면 된다”고 말했다. 피해 여중생에게 성추행의 악몽을 되살리지 않도록 하면서 법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사와 사법 당국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청환기자 ch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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