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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면 진다… 비만과의 싸움, 떳떳한 선봉 리더

입력
2015.05.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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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서 부모가 늘 준 건 사탕, 초등생 때부터 예사롭잖은 몸집

170cm 97kg이던 어느날, "좋아 보여요, 예정일이 언제죠?"

"허기보다 고립감이 고통" 비만을 정서적인 문제로 접근

1923.10.12 ~ 2015.4.29 '비만녀'였던 진 니더치는 "과식은 정서적으로 풀어야 할 정서적 문제"라 여겼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비만 탈출의 동력으로 활용했다. 그는 심리적 원인의 비만뿐 아니라 비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문명화하는데 기여했다. 2011년 플로리다 자택에서 자신의 한창때 사진을 내보이는 진 니더치. AP
1923.10.12 ~ 2015.4.29 '비만녀'였던 진 니더치는 "과식은 정서적으로 풀어야 할 정서적 문제"라 여겼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비만 탈출의 동력으로 활용했다. 그는 심리적 원인의 비만뿐 아니라 비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문명화하는데 기여했다. 2011년 플로리다 자택에서 자신의 한창때 사진을 내보이는 진 니더치. AP

진 니더치(Jean Nidetch)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고민거리를 두고 식욕을 잃는 사람과, 고민을 잊기 위해 뭐든 먹어야 하는 사람. 전자를 그는 ‘민간인(civilian)’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이어서, 우리가 벌이는 전쟁에 가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후자였다. 삶의 전반기 40년을 그는 ‘비만녀’로 불렸고, 후반기 51년 동안 스스로를 ‘前 비만녀(Former Fat Housewife)’라 불렀다. 그리고 아마 인류 최초의 다이어트 컨설팅 그룹일 ‘몸무게의 감시자들(Weight Watchers)’을 조직해 그 사업으로 부자가 됐고, 번 돈을 여성과 청소년 교육 복지 등 공익사업에 썼다. 진 니더치가 4월 29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니더치는 1923년 10월 12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수였고, 어머니는 손톱관리사였다. 밥벌이로 바빴던 부모는 간식으로 자신들의 애정을 벌충했다. “옆집 아이와 다투고 온 날이든, 비가 와서 바깥에 놀러 나가지 못하는 날이든, 친구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해 의기소침해져 있든, 어머니는 사탕으로 나를 달래곤 했어요.”(NYT, 4.29) 3.26kg으로 태어난 그의 몸집은 초등학생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 소방 훈련 때 책상 아래 들어갔다가 못 빠져 나와 애를 먹은 기억이 나요. 너무 살이 쪄서 회전목마 타는 것조차 두려웠을 정도였죠.”(Guardian)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을 정도였다. 단식, 계란-포도 다이어트, 오일 다이어트, 무지방우유 다이어트…. 효과가 아주 없진 않았지만 지속되지는 않았고, 그는 조금씩 지치고 또 적응해갔을 것이다. 24살이던 47년 마티 니디치(Marty Nidetch)와 결혼한 그는 ‘18 사이즈’ 웨딩드레스 바깥으로 비어져 나오는 허릿살이 감추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신랑 역시 비만이었고, 하객으로 온 친구들도 어금지금했다는 사실. 훗날 강연 때면 그는 “나는 과체중 운전기사와 결혼해서 과체중인 두 아이를 키우며 뚱보 친구들과 어울리고 뚱보 푸들을 키우던 비만 주부였다”(텔레그래프)고 자신을 소개하곤 했는데, 그건 웃자고 한 말만은 아니었다.

그가 갓 40세 되던 62년 어느 날. 쇼핑몰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한 이웃이 반갑게 인사하며 “정말 좋아 보이세요. 예정일이 언제죠?”라고 묻더란다. 키 170cm에 97kg이던 때였다.

그는 곧장 맨해튼의 뉴욕 시보건국 다이어트 클리닉을 찾아갔고, 거기서 자신이 비만이라는 소리를 처음 듣게 된다.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그는 “책상에 앉은 날씬한 여성이 ‘비만 클리닉 찾아오셨죠?’라고 묻더군요. 그 전까진 살이 좀 쪘을 뿐 비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충격적이었지만 ‘예스’라고 대답했죠.(…) 연필처럼 마른(pencil-thin) 영양사가 참가자들에게 다이어트 처방전을 나눠주더군요. 매주 몇 차례 생선을 먹고, 매일 빵 두 조각에 탈지우유 두 잔을 마시고…, 매주 몸무게 1~2파운드는 빼야 하고…, 다 그럴듯하게 들렸어요.”

그는 두 달 반 만에 약 9kg을 뺀다. 하지만, 썩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초라한 성과였다. 가장 큰 고통은 허기나 결핍감이 아니라 그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고립감, 격려해주고 공감해줄 그 누구도 곁에 없더라는 사실이었다. 빨래 바구니에 초코칩 쿠키를 숨겨 두고 가족 몰래 먹으면서 가족은 물론 클리닉에 가서도 그 고통과 부정(cheating)을 고백할 수 없더라고 그는 말했다. 직원들은 모두 날씬했고, 왜 그가 쿠키의 유혹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리라 여겨져서였다. (biography.yourdictionary.com, ‘Jean Nidetch Facts’) 그는 그 무렵 다이어트 프로그램들은 가장 중요한 다이어트 수단(tool)을 결여하고 있었다고, 그게 바로 ‘공감(empathy)’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말했다.

1973년 WWI(Weight Watchers International) 10주년 행사 직후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선 진 니더치. 'Weight Watchers SQ'라는 도로 표시판이 보인다. AP
1973년 WWI(Weight Watchers International) 10주년 행사 직후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선 진 니더치. 'Weight Watchers SQ'라는 도로 표시판이 보인다. AP

니더치는 곧장 뉴욕 퀸스의 자기 아파트에 비만 친구 6명을 초대, 살과의 연대투쟁을 시작했다. 각자의 처방, 경과, 성취에 대해 대화하고 비교하고 평가하는 일종의 주례 보고회. 근래 세계의 케이블 방송들이 모방하고 답습해온 바로 그 다이어트 프로그램 컨셉트였다. 10파운드를 빼면 금(도금) 핀을 주고 추가로 10파운드를 뺄 때마다 다이아몬드 칩 하나씩을 선물하는, 보상 시스템도 마련했다.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매주 25센트씩 참가비도 걷었다. 두어 달 뒤 모임 멤버는 40여 명으로 늘어났고, 그의 ‘뚱보 클럽(Fat’s Club)’은 모임 장소를 아파트의 빈 지하실로 옮겨야 했다. 그 해 10월 니더치는 몸무게 64kg의 근사한 몸매로 변신한다. 9개월 만에 무려 32.7kg을 감량한 거였다.

이듬해인 63년 5월, 그는 뉴욕의 한 극장 다락을 임대, ‘Weight Watchers International(WWI)’이라는 간판을 걸고 다이어트 컨설팅 업체 대표가 된다. 뚱보 클럽 멤버였던 사업가 펠리스 리퍼트(Felice Lippert)와 알(Al) 리퍼트 부부가 부추기고 창업자금까지 댄 덕이었다. 그들은 니더치의 설득력 있는 몸의 이력과 말솜씨를 믿었을 것이다. 거기다 탁월한 공감능력을 갖춘 리더이고 컨설턴트였다.

참가비는 영화 관람료와 똑같은 주당 2달러(훗날 3달러). 참가자는 첫날 400 명을 시작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니더치는 하루 8차례 상담세션을 진행할 정도로 바빠 그 덕에 살이 빠질 지경이 됐고, WWI는 오래된 참가자 가운데 재능과 열의를 갖춘 이들을 강사로 충원해야 했다.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시에 지부가 설립돼 68년 무렵 81곳이나 됐고, 캐나다와 유럽 등 해외 지부도 10곳이나 문을 연다. 여름 캠프 등 프로그램도 풍성해졌고, 다양한 소모임들도 생겨났다. 방송 출연과 강연 요청도 쇄도했다. 회원 소식지에 쓰던 그의 다이어트 칼럼은 미국과 유럽 300여 개 신문사에 팔려나갔다. 68년 당시 WWI 회원 수는 약 500만 명에 달했다.(NYT)

73년 뉴욕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WWI 10주년 기념식에는 희극인 밥 호프, 영화배우 펄 베일리, 오페라가수 로베르타 피터스 등이 참석했고, 회원 1만6,000여 명이 운집했다. 회원들은 스타 연예인들을 제쳐두고 니더치와 악수하고 서명을 받으려고 몰려 들었다고, 뉴욕타임스는 그의 부고 기사에 썼다.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절정의 하루였다던 그날, 니더치는 종교 지도자 같은 위엄으로 “과식이란 정서적으로 풀어야 할 정서적 문제”라는 ‘복음’을 남기고 WWI 대표직을 리퍼트 부부에게 넘긴다. 그 뒤로도 그는 97년 은퇴할 때까지 WWI의 홍보 및 컨설팅 자문역으로 일했다. 그의 후임은 영국 앤드루 왕자의 부인(96년 이혼)이었던 요크 공작비 사라 마가렛 퍼거슨이었다. 니더치는 66년 의 요리책을 시작으로 3권이 다이어트 관련서를 썼고, 70년에는 자서전 이야기를 출간했다.

니더치는 전문 교육을 받은 다이어트 전문가나 영양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의료 전문 컨설팅이 아닌 정서적 리더로 제한했고, 회원들에게 각자 의사와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상담할 것을 의무화했다. WWI 모임 참가 전 반드시 식사를 하고 오라는 철칙을 세운 것도 그였다. “굶주린 이에게 금욕과 절제를 떠벌려서도, 수치스럽게 해서도, 괴롭혀서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자서전에 회원들과 대화하며 얻은 경험과 일화들을 소개했는데 이런 것도 있었다. “한 교사의 고백이었어요. 어느 날 학생이 먹다 남은 도넛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봤는데 그날 수업을 다 끝낼 때까지 그게 잊히질 않더라는 겁니다. 오후 3시 방과후 그는 교실 문을 잠근 뒤 쓰레기통을 뒤져 그 도넛을 주워 먹었대요. 그 일이 수치스러워 내내 괴로워하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다 우리 모임에서 고백을 한 거였죠. (…놀라운 것은) 그 순간 그 방에 있던 우리 모두가 그녀의 동지였다는 사실이었어요.” 가디언 인터뷰에서는 모임 초기의 경험을 이렇게 전했다. “당시 모임 멤버들- 대부분 여성이었는데-은 더 이상 누구도 혼자 박탈감을 겪거나 절망하지 않았어요. 완전한 타인들이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를 격려했어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도 WWI 지부가 있다. “우리 모임에선 유대인과 아랍인이 한 클래스에 함께 참가합니다. 거기 모인 이들은 절대 서로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아침 식사로 각자 뭘 먹고 왔느냐는 거였으니까요.”

니더치는 고교 졸업 후 롱아일랜드 대학에 합격하지만 학비가 없어 등록을 포기했고, 42년 어렵사리 뉴욕시립대 비즈니스코스에 등록한 직후 아버지가 숨지면서 학위 대신 직업을 구해야 했다. 결혼 전 가구공장에서 받은 급여는 주당 10달러. 경마 정보지 발행업체에 취업한 적도 있지만 당시 뉴욕 시장(피오렐로 라 과르디아)의 경마 반대 캠페인 때문에 업체가 폐업, 실직 생활을 하기도 했다. 결혼 후에는 동네에서 가가호호 계란을 배달하고 수금하는 일을 했다.

그의 후임이자 대주주인 알 리퍼트는 78년 WWI를 네덜란드 식품회사인 하인즈그룹에 매각한다. 매각 대금은 7,120만 달러. 니더치도 자신의 지분에 해당하는 약 700만 달러를 받는다. 그는 ‘진 니더치 재단’을 설립해 빈민 자립과 빈곤가정 청소년 진학을 지원했고, 캘리포니아대학과 네바다주립대학에서 장학사업을 벌였다. 94년에는 성년 여성 교육기관인 ‘진 니더치 여성센터’를 설립했다. 네바다대학은 93년 그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비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의학적 연구가 활성화하면서 비만의 원인이 오직 정서적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습관뿐 아니라 유전적ㆍ체질적 특성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호르몬과 중추신경계 이상의 결과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니더치가 착안한 정서적 문제 역시 스트레스 등 정신병리학적인 세부 이론들로 설명되고 있다. 처방 역시 복잡해지고 전문화했다. 물론 인류는 아직 원치 않는 살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비만(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조금씩 예의 발라졌다. 니더치는 비만인들의 상처와 고통을, 그들에 대한 사회의 폭력적 시선과 몰이해를 드러내고 고발함으로써 비만 자체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문명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을 도와 원치 않는 습관을 극복하게 한 공로로 1988년 ‘레이디스 홈 저널’이 뽑은 ‘21세기 가장 중요한 여성 100인’(1988) 등에 뽑혔고, 공동저작 ‘1000년, 1000명: 밀레니엄을 만든 남성과 여성들’(1998)이란 책에 수록되기도 했다.

71년 이혼한 전 남편과 세 아들(둘은 사망)을 둔 그는 플로리다 파크랜드의 한 실버타운 침실 하나짜리 아파트에서 혼자 검소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살을 빼려면 음식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먹는 게 삶의 보상일 수도 삶의 하이라이트일 수도 없다. 삶의 보상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그는 먹는 게 삶의 ‘유일한’ 보상이 되게 하지는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가장 달콤한 방법 중 하나가 먹는 것이니.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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