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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의 호기심, 카키색 일상을 일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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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의 호기심, 카키색 일상을 일깨우다

입력
2015.05.2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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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군인은 군 조직의 가부장적 속성을 희석하는 대신 남성 군인을 위한 성적 존재로 타자화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여성 군인은 군 조직의 가부장적 속성을 희석하는 대신 남성 군인을 위한 성적 존재로 타자화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에서 가장 군사화된 존재는 당연히 제복을 입은 군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페미니스트 국제정치학자 신시아 인로는 “바로 시민들”이라고 말한다. 시민들이 우리 시대의 가장 군사화된 존재들이라고? 군인의 아내가 결혼생활보다 군대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남편의 뜻을 따른다면, 그녀는 군사화한 것이다. 어느 판사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자유를 침해 받은 시민에게 패소 판결을 내린다면 그 판사는 군사화한 것이며, 시민 유권자들이 복잡하고 지루한 외교적 해결책보다 군사적으로 국제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면 그 시민들 역시 군사화한 것이다. 군사주의는 그것이 군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는 점 때문에 문제적이다. 그 외부는 지구화와 자본주의가 괴력을 발휘하는 곳으로, 군사주의는 이 둘과 삼각동맹을 맺는다.

‘군사주의는 어떻게 패션이 되었을까?’는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는 것들에 페미니스트 호기심을 발휘해 ‘왜?’를 묻는 책이다. 세계 즉 국제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젠더라는 전제 하에, 그는 신발장 속 나이키 운동화를 통해 글로벌 경제와 결합한 군사주의를 읽어내고, 아기의 카키색 양말에서 젠더화된 군사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논한다. 젠더 없이 군사화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양하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논증한다.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에 있었던 나이키 공장을 떠올려보자. 비용 절감을 위해 공장 이전을 고민하던 나이키 경영진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러브콜을 받고 ‘값싼 노동력’이 넘쳐나는 부산으로 공장을 옮겼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 밑에서 얌전히 살림을 배우다 시집 가는 게 여성의 삶이라고 믿고 있던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가부장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여성 노동력을 값싼 노동력으로 만들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생활비 벌어 생계를 돕고 오빠의 대학 학비를 보태며 미래의 남편을 위해 종자돈을 모아놓는 순종적인 딸’로서의 여공 이미지를 널리 유포한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나이키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을 순종적인 딸이 아닌 어엿한 시민으로 여기게 되고, 여성의 노동을 ‘값싸게’ 유지하는 일은 힘들어졌다. 정부는 군사화된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진압하고, 나이키는 새로운 순종적인 딸들을 찾아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노동력을 저임금으로 만들고 유지하려는 활동들은 이렇게 군사주의에 의존한다. “하얗거나 파랗거나 네온핑크인 수많은 운동화의 안쪽이 실은 카키색이 바느질되어 있다.”

징병제인 남성병역법이 폐지되면서 많은 국가의 군대에서 중간계급 남성이 줄어드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렇다고 믿을 수 없는 인종?종족 집단의 남성을 대거 고용할 수는 없다. 이때 호출된 것이 현대 여성의 글로벌한 아이콘처럼 여겨졌던 여성군인이었다. 그러나 군은 조직이 여성화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군이 가부장적 속성을 잃지 않기 위해 여성군인은 군인이기에 앞서 여성이어야 한다. 드물게 남녀 모두 군 징병 대상인 이스라엘에서 여성군인이 언제나 여성스럽고 성적이며 남성 동료의 관심을 끄는 존재로 언론에 묘사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여성군인에 대한 군대 내 성희롱과 성폭행이 그토록 빈번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2006년 있었던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 사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라크 남성 포로의 성기를 희롱했던 미 여군의 사진이 공개되며 전 세계를 경악시킨 이 사건은 한 비정상적 여성의 일탈이 아니라 포로를 여성화해 그들의 지위를 낮추고 모멸하려는 군의 ‘포로 여성화’ 전략의 일환이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군이 여성성을 활용하는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미군기지가 주둔해 있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아기를 키우는 일본인 동료가 친구에게 너무 귀엽고 앙증맞다며 선물 받은 폭격기 그려진 카키색 아기 양말을 보게 된다. 안보는 군사력의 결과물이라는 군사주의적 믿음은 이렇게 모성마저 군사화한다. 우리의 일상은 이미 도처에서 군사화되어 있다. 평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잠식한 이 군사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페미니스트의 호기심이 필요하다. 세상 만사는 젠더의 동역학에 따라 움직이며, 세상에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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