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수룩한 머리에 초점이 풀린 눈.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누난데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짝사랑을 찾아 방송사에 입사했다는 사내는 ‘사고뭉치’다. 출근 첫 날부터 방송 출연자에 하차 통보를 제대로 하지 않아 제작진과 출연자 사이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대형사고를 쳤다. 융통성 없이 앞 뒤가 꽉 막혀 선배들 사이에서 ‘미운 오리새끼’로 통한다. 예능 PD인데 농담도 제대로 못 받는다며 구박 받는 게 일상이다. KBS2 금토드라마 ‘프로듀사’ 속 배우 김수현(27)의 모습이다. 말투까지 어눌한 ‘어리바리’ 신입사원 백승찬 PD는 그간 김수현이 맡았던 매력 넘치는 능력남이 아니라 지난해 인기 드라마 ‘미생’ 속 장그래에 가깝다.
‘프로듀사’에는 화려한 한류스타 김수현은 없다. 김수현은 지난해 2월 끝난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이후 ‘캐스팅 1순위’ 배우로 꼽혀왔다. 영웅을 내세운 블록버스터 대작들의 러브콜이 잇따랐다. 김수현 측에 따르면 김수현은 미국 할리우드에서 신작 영화 출연 제의도 받았다. 백지수표를 제시하며 섭외를 해 온 중국 제작사도 있었다. 해외에서만 김수현을 찾은 건 아니다. 김수현은 올해 방송을 목표로 기획 중인 드라마 ‘프랑켄슈타인’(래몽래인)에서 출중한 의술을 지닌 다중인격 의사 캐릭터 섭외 1순위로 꼽혔다. 더욱이 김수현은 올해나 늦어도 내년에는 군에 입대해야 할 나이라 출연작 선정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김수현이 백지수표와 청춘스타로 도약할 수 있는 멋있는 배역을 마다하고 ‘프로듀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만난 김수현 측은 “평범한 김수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김수현은 그간 왕(‘해를 품은 달’)이나 초능력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 등 카리스마 넘치지만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역을 맡아 인기를 누렸다. 20대 배우가 줄 수 있는 풋풋함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환상만 불러일으켰던 게 사실. 실수투성이지만 현실적인 신입사원 캐릭터로 대중적인 친화력을 높이고 싶었다는 게 김수현 측의 말이다.
김수현의 ‘프로듀사’ 출연 결정은 단 3일 만에 이뤄졌다. ‘프로듀사’를 연출하는 서수민 PD는 “차태현을 먼저 섭외하고 신입 PD로 누굴 쓸까 고민하던 차에 기대 않고 그냥 현재 가장 핫한 김수현 측에 지난 1월 구정 연휴 때 ‘잠깐 보자’고 연락했다”며 “그런데 만나고 사흘 뒤에 바로 하겠다는 연락이 와 꿈인 줄 알았다”며 웃었다. 김수현 측은 “서 PD가 예능 PD라 ‘KBS 예능국에서 왜 보자고 할까’란 생각을 하고 만났는데 ‘프로듀사’ 대본을 건네더라”며 “처음엔 놀랐고, 캐릭터와 이야기의 매력에 끌려 3일 만에 출연을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듀사’는 KBS 예능국이 처음으로 기획한 드라마다. ‘별에서 온 그대’를 쓴 박지은 작가가 대본을 썼지만, 드라마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드라마국에서 기획한 게 아니라 위험 부담도 컸다. 이런 상황에서 김수현이란 ‘대어’를 잡아 작품의 시장성을 높이려 했던 KBS 예능국의 바람과 김수현 측의 ‘미생’역에 대한 갈증이 맞아 판이 벌어진 것이다.
‘미생’ 캐릭터에 대한 김수현의 욕심은 생각보다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수현 측에 따르면 김수현은 ‘별에서 온 그대’와 비슷한 출연료를 받고 ‘프로듀사’에 출연했다. 김수현이 ‘별에서 온 그대’에서 받았던 출연료는 회당 5,000만원에서 1억원 사이다. 이후 그의 주가가 더 뛴 것을 고려하면, 출연료를 방송사에 한 발 양보한 셈이다. 대신 김수현 측은 드라마 중국 수출 등에서 벌어들이는 수익 배분 등을 조건으로 KBS와 출연료 조율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수현 측은 “김수현이 입대를 앞두고 있는 만큼 입대 전 작품은 되도록 국내에서 하자는 뜻도 반영됐다”고 귀띔했다.
김수현의 합류로 KBS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드라마 수출 등에서 이미 ‘김수현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KBS 관계자에 따르면 ‘프로듀사’는 중국의 한 온라인 스트리밍 업체에 편당 20만달러(약 2억1,800만원)에 팔렸다.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이 지난 1월부터 해외 영상물 온라인 사전 심의제를 실시한 뒤 한국 드라마의 수출 판권 가격은 3분의 1수준까지 떨어졌다. 온라인 사전 심의 실시 직전인 지난해 말 중국에 이종석 주연의 SBS 드라마 ‘피노키오’가 회당 28만달러(3억5,300만원)에 팔렸는데, 온라인 사전 심의제 실시 후 한류스타 A씨가 출연한 드라마는 회당 8만달러(약 8,700만원)까지 거래 가격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20만달러까지 가격을 높인 건 김수현의 현지 인기 덕이라는 게 드라마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KBS는 중국 외에도 일본 등 10여개국과 드라마 판권 수출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양승준기자 come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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