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어촌, 이름 모를 노부부가 살고 있다. 이른 새벽 작은 체구의 노인이 잠에서 깬다. 덩치 큰 아내는 이미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욕실에서 아무데나 옷을 벗어 놓는 버릇 때문에 남편을 무섭게 혼내기도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바다처럼 넓고 깊다. 그건 노인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해가 뜨기도 전에 집을 나선다. 하지만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노인은 작은 고기잡이 배 ‘마리아’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거대한 트롤선 그물에 걸려 죽을 뻔한다. 가까스로 살아난 그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신세가 되고, 아내는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나선다.
평범하게 흘러가던 이야기는 이때부터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연이어 펼쳐 놓는다. 남편은 폭풍우에 휘말려 다시 한번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도 모자라 해적을 만나 컴컴한 창고에 갇힌다. 아내는 남편이 쿠바에 있다는 점쟁이의 점괘를 믿고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쿠바로 향하는 대형 유람선에 오른다. 부부는 과연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뭉클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사랑의 바다’는 노부부의 사랑을 오로지 그림만으로 그린 그래픽 노블이다. 참 심심한 제목이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이보다 더 적절한 제목이 있을까 싶다. 구식이어서 더 애틋하고 진한 사랑, 이 책에는 거창하거나 멋스럽게 은유적인 제목보다 심심하고 직접적인 이 제목이 어울린다.
지난해와 올해 앙굴렘만화페스티벌에서 수상한 윌프리드 루파노가 시나리오를 짰고 그레고리 파나치오네가 그림을 그렸다. 루파노는 그래픽 노블 분야에서 뛰어난 대사 구성력으로 인정받은 작가인데 이번엔 단 한 줄의 대사나 지문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그림과 장면 속의 문자로서 단어가 몇 자 있을 뿐이다. 글이 없으니 자연스레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인물의 표정, 손짓과 몸짓, 장면의 변화, 이야기의 리듬이 대사와 지문을 대신한다. 무성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두 작가는 애틋한 노부부의 사랑과 기상천외한 모험담을 결합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곳곳에 심어 놓았다. 어류를 대량 포획하고 폐유를 내다버려 바다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거대 자본, 불법과 폭력을 일삼는 해적의 잔혹함, 유람선 위에서 펼쳐지는 빈부 격차의 단면 등으로 비판 정신을 보여준다. 엉뚱하고 따뜻하고 진지하며 아름다운, 보고 나도 다시 보고 싶은 그래픽 노블이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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