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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한국인 첫 등정 좌절의 기록… 하지만 후회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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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한국인 첫 등정 좌절의 기록… 하지만 후회는 없으니

입력
2015.05.2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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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네팔에 대재앙이 닥쳤다. 규모 7.8의 지진이 히말라야 자락의 순정한 나라를 뒤흔들었고 8,00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갔다. 지진의 피해는 에베레스트에도 뻗쳤고, 세계 최정상을 오르기 위해 전진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던 상당수의 등반대원들이 눈사태에 비명을 달리했다.

네팔의 재앙이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우리에게 친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친근함의 상당 부분은 에베레스트를 품은 히말라야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 산악역사에서 내로라 하는 업적을 세운 한국 산악인들의 도전이 무수히 이어졌고, 최근엔 히말라야 트레킹 바람까지 불어 일반인들도 대거 네팔을 찾았다.

8,000m가 넘는 고산을 오르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다. 그 행위를 기록한 글들은 한편의 영화처럼 갈등과 긴장, 진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눈 속에 피는 에델바이스’도 히말라야에서의 도전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글들과 다른 건 빛나는 성취보다는 뼈 아픈 실패와 좌절, 고뇌에 대한 기록이란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77KEE)의 부대장이었던 박상열씨다. 고(故) 고상돈 대원보다 먼저 정상에 도전했던 대원이다. 그가 성공했다면 세상은 그의 이름으로 에베레스트를 기억했을 것이다.

1977년 9월 5일 원정대장은 1차 정상 공격조로 그와 셰르파 앙 푸르바를 선택했다. 최종 단계에 가장 컨디션이 좋은 대원을 고른 것이다.

대원들의 염원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그들은 정상으로 향했다. 해발 8,490m에 차린 마지막 캠프에서 자는데 새벽 2시쯤 갑자기 산소가 나오지 않았다. 천막 밖으로 나가 갈아 끼워야 하는데 좀처럼 잠을 떨치기 어려웠다. 고소에서 산소 공급 없이 잠이 드는 바람에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 길을 나서는 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더미 같은 폭풍설이 몰아쳤다. 남봉을 넘어 나이프 릿지를 지나 힐러리 스텝 앞에 섰을 때, 마스크에서 또 산소가 나오지 않았다. 다 떨어진 것이다. 무산소 등정은 당시로선 무모한 도전으로 얼마 더 전진했지만 정상까지 표고 40m를 앞두고 결국 고집을 꺾어야 했다.

그렇게 허탈하게 내려오는 길, 뒤에 따라오던 앙 푸르바가 쓰러졌다. 뒤돌아보니 앙 푸르바가 서로를 연결해 묶은 안자이렌 줄을 풀어버렸다. 혼자 가란다. 내 한 몸 추스르기 힘든 극한 상황이지만 사지에 동료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다시 되짚어 올라가 앙 푸르바를 일으켜 세워 내려오는데 해가 졌다.

산소도 없고 텐트도 없고 침낭도 없는 해발 8,700m의 눈보라 속,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비박을 했다. 그들은 산소 없이 인간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높이에서 무산소로 비박을 하고 기적처럼 살아났다. 그리고 겨우 마지막 캠프에 도달했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하산했다.

얼마 후 베이스캠프에서 고상돈 대원의 성공 소식을 들었다. 누구보다 기뻤지만 누구보다 허전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자책할수록 자기 자신은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 기념 등반을 나설 때였다. 그를 만날 기회가 있어 “후회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산사나이의 편안한 미소로 “후회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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