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탕, 떡볶이, 낙지볶음, 김치찌개…
25년 전, 내가 외국에 살면서 가끔 한국에 올 때만 해도 매운 음식이 많지는 않았다. 위에 꼽았던 것들 정도가 매운 음식에 속했다. 그런데 요즘엔 듣도 보도 못한 메뉴들을 내건 간판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매운 갈비찜, 매운 치즈 등갈비, 매운 치킨, 매운 족발, 매운 닭발 등등 매운 음식 천지다. 점점 매워지다 못해 이제는 외국 음식이 한국에 넘어 오면 매운 맛을 더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메뉴들, 이를테면 매운 파스타, 피자, 스테이크, 돈까스 심지어 초밥까지 등장한 걸 보면 말이다.
매운 음식, 물론 좋다. ‘시대가 변하면 입맛도 변한다’는 맥락에서 매운 맛이 식탁을 점령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요즘의 매운 맛 열풍은 뭔가 불편하다.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다.
먼저 매운 음식과 함께 곁들여 먹는 사이드 메뉴들이 그렇다. 매운 떡볶이와 함께 먹는 걸쭉한 유산균 음료, 매운 등갈비나 돈까스에 뿌려져 나오는 싸구려 모조 치즈(여기서 치즈는 진짜 치즈가 아닌 팜유나 쇼트닝이 유화제로 굳어진 치즈 모양의 무언가를 말한다) 등은 매운 맛을 완화해 주는 아이템들이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굳이 맵게 먹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싶다.
예전엔 매운 음식과 궁합을 이루는 음식이나 식재료가 비단 매운 맛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오래 전 아버지들이 퇴근길 시장함을 달래기 위해 골뱅이 무침에 비벼 드시던 국수(소면)가 그렇고, 고추기름이 들어가 매콤한 육개장과 닭개장에 풀어 먹던 달걀 한 알이 그렇고, 떡볶이와 혼연일체가 된 삶은 달걀과 튀김만두가 그렇다. 그들은 작은 사치이자 함께 먹는 맛과 재미 때문에 매운 음식과 단짝이 됐을 터다.
그리고 매운 맛 열풍이 불편한 또 다른 이유는 매운 맛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은 데 있다. 캡사이신(capsaicin, 고추에서 추출되는 무색의 휘발성 화합물, 몸에 나쁘다는 말은 아직 없는 걸로 알고 있다)이 당연한 듯 첨가되고, 매운 맛 음식을 내건 가게 주방장들의 손엔 저마다의 비밀병기가 장착돼 있다.
그런데 외국에 가면 변형하지 않은 재료로 맛깔난 매운 맛을 뽐내는 음식들이 널렸다. 월남 쌀국수(Pho)에는 맵디매운 새눈고추가 듬뿍 들어가고, 멕시코에서 닭고기와 함께 먹는 소스인 몰레에는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라는 ‘아바네로(Habanero) 고추’가 들어간다. 중국 쓰촨지방에서 음력 1일과 15일에 만들어 먹는 돼지고기 간장 조림인 ‘훙사오러우’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양의 고추가 들어가고, 에티오피아에서는 심지어 밥을 지을 때 고추를 넣어 짓는다.
내가 매운 맛 열풍을 불편해하는 마지막 이유는, 매운 맛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시선이다. 나도 최근 ‘아니 왜 한국사람이 매운 음식을 싫어해?’라는 눈길을 받은 적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매운 맛의 본고장이 우리나라라고 생각하며 자부심까지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매운 맛은 세상 곳곳에 널렸다.
나는 오래 전 만화가게에서 팔던 밀가루떡볶이보다 매운 건 못 먹고, 타바스코 소스를 매운 맛의 최상급으로 여기며, 고추장도 집에서 담근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좋고, 삼겹살을 먹을 때도 청양고추가 아닌 풋고추를 찾는 사람이다.
극강의 매운 맛으로 대동단결하기보다 서로의 입맛과 취향을 존중하다보면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음식의 종류도 훨씬 다양해질 것이다. 먹자 골목에서 매운 음식 빼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확 줄어드는 요즘과 달리 말이다.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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