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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선] 우리나라에서 '영웅'이 나오기 힘든 이유

입력
2015.05.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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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길을 가던 한 작은 남성이 그 소리를 듣고 골목길로 뛰어 들어가니, 한 아리따운 여성을 둘러싸고 남성 셋이 몹쓸 짓을 하려는 듯 보인다. 그런데 행인인 줄 알았던 그 작은 남성이 알고보니 무려 8체급을 석권한 복서 매니 파퀴아오였다. 인파이터인 파퀴아오는 귀신같이 상대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 순식간에 셋을 KO 시켜버렸다. 그럼 파퀴아오와 그 여성은 과연 서로에게 감사한 마음을 안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그 장소가 한국이라면, NO이다. 왜냐하면 파퀴아오는 쌍방폭행범으로 입건되어 경찰에 최소 3~4번 출석하여 지리한 대질조사를 마치고, 쓰러진 사람들이 누워있는 나일론 병원 찾아가서 합의해 달라고 몇 번이나 읍소하느라 바빠 그 여성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생각을 하긴 하되,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생각할 것이다. ‘젠장, 괜히 나섰어…’라면서 말이다.

왜 정당방위가 아니라 쌍방폭행일까.

정당방위란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형법 제21조 제1항)로서 벌을 면한다. 그런데 위의 경우 타인의 법익이 부당히 침해 당할 뻔했다. 이 경우야 말로 정당방위가 인정되어야 할 가장 의로운 경우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방위”에 있다. 우리나라는 제 아무리 부당한 침해가 있더라도, 오직 철저히 “방위”에 해당하는 행위, “방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행위만 정당행위로 인정하고 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한 장면. 현실에서는 이렇게 무턱대고 싸워서는 안된다. 인정 상 사정은 봐가면서 살아야 한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한 장면. 현실에서는 이렇게 무턱대고 싸워서는 안된다. 인정 상 사정은 봐가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방위의 범주에 벗어나지 않는 행위라는 게 무엇인가. 경찰청 지침을 인용하겠다.

“1. 먼저 도발했으면 안 된다. 2. 먼저 폭력을 행사했어도 안 된다. 3. 가해자보다 더 심한 폭력은 금물이다. 4. 흉기나 위험한 물건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5. 상대가 때리는 것을 그친 뒤에는 나도 멈춰야 한다. 6. 상대의 피해 정도가 나보다 심해서는 안 된다. 7. 전치 3주 이상의 상해를 입혀서도 안 된다.”

내가 먼저 깐죽거리고 화를 돋구었다면, 상대가 주먹을 휘둘러도 난 그냥 맞아야 한다. 왜 난 도발자니까.

내가 만일 주짓수, 유도, 검도 등 각종 운동의 유단자라면? 상대가 덤벼도 그냥 맞거나 도망가야 한다. 왜? 저 사람의 피해 정도가 나보다 더 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일 나는 한 코피만 흘리는데, 상대가 쌍코피를 흘린다면? 어서 한 쪽 뺨을 적에게 내주고, 쌍코피를 터뜨려주길 기다려라.

내 아무리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무도를 배웠더라도, 약자가 설령 당하더라도 함부로 주먹을 써선 역시 안 된다. 나서는 순간 상대의 피해 정도가 더 클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땐 나만의 화려한 언변과 강렬한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듣고 덤빈다면? 그땐 그저 여자 손을 잡고 도망가는 게 최선이다.

술에 취한 아저씨 한 명이 내게 술 먹고 시비를 걸며 덤비는데, 나는 그보다 키도 20센치 작고 몸무게는 40킬로 덜 나가는 여성이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옆에 있는 몽둥이나 철봉을 잡고 휘둘러서는 결코 안 되고, 맨 주먹으로 싸워야 한다. 왜? 흉기나 위험한 물건을 사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경우만이 거의 유일하게 주먹을 휘둘러도 정당방위가 되는 경우지만, 이때 주먹을 휘두르는 멍청이 여성은 없을 것이다.

상대가 날 때리다가 잠시 방심하며 담배 한 대를 꺼내문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반격한다. 하지만 그 순간 정당방위는 되지 않고 쌍방폭행이 된다. 왜? 상대가 폭력을 멈추었는데도 비열하게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의 정당방위 요건이다. 정당방위로 인정받기가 이토록 어려우니, 제 아무리 피해자로서 억울한 경우에 직면하더라도 함부로 싸움에 응할 수가 없다. 그냥 얻어맞는 게 몸은 불편해도 맘은 편하다. 남이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모르는 척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렇게 인정받기 어렵게 만들려면 도대체 정당방위 규정은 왜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간 경찰은 정당방위 요건을 조금 더 현실성 있게 완화하겠다고 여러 번 발표했지만 (예컨대, 여성과 아동은 흉기를 사용해도 되게끔 지침을 바꾸겠다라는 식으로), 아직까지도 성과 있는 변화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쯤되면 수사기관이 누구 편든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됐어. 둘 다 똑같이 잘못인 것으로 해”라며 죄다 쌍방폭행으로 가는 게 아닐까 의심까지 든다.

우리나라의 정당방위는 결코 정당하지 못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행범의 혀를 깨문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받는 데에도 그토록 힘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십 년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살해하여도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의를 보더라도 대체로 참는다. 우리 사회에는 영웅이 생기기 무척이나 힘들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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