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임종을 앞둔 아버지는 폭탄 선언을 했다. “집은 둘째에게, 예금은 셋째에게 물려준다.” 친족들은 “아무리 그래도 맏이에게 뭐라도 남겨줘야 한다”고 술렁였다. 폐암에 걸린 아버지가 가쁘게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는 많이 배웠고 동생들에 비해 살만하다”는 게 요지였다. 친족들의 설왕설래는 한동안 이어졌다.
정작 유산 한 푼 물려받지 못한 당사자 부부는 기꺼이 순종했다. 1년 넘게 아버지를 간병했고 병원비도 대부분 감당했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생 살아온 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원칙을 토씨 하나까지 존중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사랑한다”는 작별 인사를 전하는 세 아들과 포옹한 뒤 눈을 감았다.
내 아버지는 대개 그 시절 아버지들이 그렇듯 무뚝뚝했다. 그러다 과음하는 날이면 야밤에 어린 삼형제를 두들겨 깨워 평소 못한 말의 할당량을 채우기라도 하듯 일장 훈시를 쏟아냈다. 레퍼토리는 늘 같았다. “돈보다 우애가 중요하다.” 종아리가 저리고 졸린 기억 밖에 없지만, 가난한 아비의 넋두리가 은연중 세뇌된 덕인지 삼형제 중 이른바 돈 잘 버는 직업을 기웃거린 놈은 없다.
둘째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조부로부터 유산을 받지 못했다. 고향 섬에 들러 “예전엔 저 지평선까지 우리 땅(염전)이었다”고 했으나 선대에 많이 쪼그라들었고 그나마 남은 땅도 큰아들 몫이었다. 그 땅마저 팔아먹었다는 얘기가 들렸을 때, 되레 출가한 고모들이 나서 문제 제기를 할 정도였지만 아버지는 겉으로 개의치 않아했다. “장남이라도 잘 살아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아이들 준비물 살 돈이 없어 동네방네 돈을 꾸던 어머니가 면박을 주기라도 하면 예의 레퍼토리를 읊조렸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비유컨대 윗대의 선(先) 성장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장남에게 재산을 몰아줘야 집안 전체가 흥하리라는 순진한 기대는 부의 쏠림 현상과 갈등만 증폭시켰다. 어떻게든 분란을 봉합하려고 노력했던 아버지는 거창하게 말하면 삶의 마지막 순간 당신의 알량한 재산으로 자식간에 분배 우선 정책을 실현하고 싶었을 게다.
아버지의 마지막 실험은 현재 순항 중이다. 둘째는 집 걱정을 덜었고, 막내는 못다한 공부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차례나 제사 같은 집안 대소사도 분배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나는 전과 설거지, 둘째는 생선, 셋째는 추도예배 주관, 세 며느리는 각자 잘하는 나물 등을 담당한다. 아버지가 바란 부의 분배로 물질은 내 입장에서 하향 평준화했지만, 형제간 우애는 날로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단언컨대 내 아버지만큼 성장과 분배 논쟁의 핵심을 명징하게 일깨워준 학자나 전문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부의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부른다. 노동자의 8할이 일하는 중소기업 평균 임금이 대기업의 절반 가량(62%)인데다 그 격차가 날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대기업이 잘되면 중소기업, 나아가 서민들이 더불어 잘살게 되리라는 주장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결정권을 쥔 누군가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가계는, 공동체는, 국가는 행복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전제가 있다.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꾸준한 공감과 배려로 다져진 원칙이 바로 서야 순종이 뒤따른다.
원칙을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여긴다는 대통령이 집권하는 나라에서 도무지 원칙을 찾을 수 없는 건 아이러니다. 구조개혁은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면서 이전투구로 허송세월 하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대통령 말처럼 한숨만 나온다. ‘원칙이 있는 아버지(어머니), 순종하는 아들(딸)’이란 명제는 가정의 달에도, 현재 국내 현실에도 유효하다.
사실 임종 며칠 전 아버지는 남 모르게 내게 유산을 남겼다. 어렵게 티켓을 구해 당신의 평생 소원이라던 송해 콘서트에 함께 다녀온 날, 아버지는 여운에 젖어 뽕짝 가요를 흥얼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너에게 줄건 네 동생들뿐이다. 잘 맡아다오.” 돌이켜보니 당신의 가장 귀한 재산을 내게 물려주신 셈이다. 정부와 정치가 평범한 내 아버지가 남긴 감동의 털끝만이라도 보여준다면 나는 기꺼이 따르겠다.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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