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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권 협상 급물살에… 문화재 반환은 생색내기용 장식물로

입력
2015.05.1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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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대일 배상요구조서

3분의 1이 고서적·미술품 등 목록

한국 "반환" 요구에 日은 "기증" 맞서

협정 조인 앞두고 막판 협상서 합의

"개인 소유 문화재는 기증 권장"

구속력 없어… 현황 파악도 불가능

한국이 돌려받은 문화재 1,432점 뿐

주로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 한정

日 국립대학 소장품도 반환 안해

한일 문화재 협정에 따라 1966년 일본이 ‘인도’한 한국문화재를 한국측 관계자들이 점검하고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한일 문화재 협정에 따라 1966년 일본이 ‘인도’한 한국문화재를 한국측 관계자들이 점검하고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일본 정부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리인 사유재산에 대해 이런저런 구속을 가하는 것은 헌법상 불가능하다.”(일본 측)

“잘 알고 있다.”(한국 측)

“그렇다면 여기에 적혀있는 ‘권장할 것’이라는 문구는 일본 정부에는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 문구에 의해 일본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일은 없을 것이고, 또 취할 수도 없다.”(일본 측)

“그래도 괜찮다. 한국 측도 ‘기증되길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꼭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한국 측)

한일협정의 조인을 4일 앞둔 1965년 6월18일 밤 일본 도쿄 힐튼호텔에서 열린 문화재 반환을 둘러싼 막바지 조문 협상에서 일본 측의 마쓰나가 노부오(松永信雄) 당시 외무성 조약과장은 한국 측의 방희 주일대표부 공사에게 협정문에 적시된 ‘권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을 거듭 확인했다. 그 결과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에서 일본 측은 일본인 개인이 소유 중인 한국 문화재를 자발적으로 한국에 기증하는 것에 대해 “이를 권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회담의 최대 쟁점 중 하나였던 일본인 개인 소장 우리나라 문화재의 반환 문제는 이렇게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권장 사항’이 됐다. 더욱이 이 문제는 ‘문화협력’이라는 추상적인 명제에 압도돼 외교 쟁점에서 완전히 배제되게 됐다. 실제 한일협정 체결 이후 일본 정부가 자국 국민에게 문화재의 한국 반환을 ‘권장’한 일은 전혀 없다. 한국 정부 역시 일본인 개인 소장 한국 문화재를 자발적으로 ‘기증’하라고 촉구한 적이 거의 없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해외 소재 한국 문화재 15만6,000여 점 가운데 6만6,000여 점이 일본에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공기관 보유분을 의미하며 일본인 개인이 갖고 있는 한국 문화재의 경우는 현황 파악조차 불가능한 형편이다.

문화재 문제는 1951년 한일회담이 시작된 이후 한국이 가장 자신감을 보여 온 분야 중 하나였다. 이승만정부가 1949년 작성한 600쪽에 이르는 ‘대일배상요구조서’ 가운데 3분의 1인 190쪽이 고서적, 미술품 등 문화재 반환 요구 목록이었다. 더욱이 당시 한국 정부가 반환을 요구한 문화재는 일본 내의 소재지와 소유자 정보까지 매우 상세하고 정확했다. 1960년대 문화재 관련 한국 측 대표를 역임한 서지학자 이홍직은 “소재지가 분명하므로 다른 어떤 안건보다도 확실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한국 문화재도 일본의 민간 소장품이 아니라 일본 정부 등이 보유하고 있던 것을 말한다.

2006년 7월 도쿄대가 서울대에 '기증'한 '조선왕조실록'(오대산 사고본) 47권의 일부. 당시 도쿄대 측은 소장 경위에 대해 "자존심을 걸고 조사했지만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 도쿄대 교수였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古)는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계에게 요청해 1912년 실록을 도쿄대에 반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6년 7월 도쿄대가 서울대에 '기증'한 '조선왕조실록'(오대산 사고본) 47권의 일부. 당시 도쿄대 측은 소장 경위에 대해 "자존심을 걸고 조사했지만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 도쿄대 교수였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古)는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계에게 요청해 1912년 실록을 도쿄대에 반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갓 독립한 한국이 그런대로 상세한 ‘약탈’ 문화재 목록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직후 활동을 재개한 진단학회가 일본 소재 우리 문화재의 목록을 대거 확보했기 때문이다. 송석하 이병기 김두현 이인영 등은 과거 조선총독부나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 등에서 활동한 경력과 인맥을 살려 일본의 패전으로 한국을 떠난 일본인 조선사연구자들로부터 관련 자료를 입수했다. 가령 ‘대일배상요구조서’의 고서적 반환 요구에 관한 설명을 보면 일본 서지학의 연구 성과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일본의 서지학 연구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1945년 일본에 귀국하는 과정에서 사학자 이상백을 통해 조선의 서적을 진단학회에 대거 기증했는데, 이것이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희귀도서로서 보관돼 있다. 요컨대 과거 친일 및 식민사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인사들이 해방 후 ‘반일’의 물결 속에서 우리 문화재 지키기에 기여한 셈이다.

한국 측은 이렇게 확보한 막대한 분량의 일본 소재 문화재 목록을 1953년의 제2차 한일회담에서 일본 측에 처음으로 내놨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알려진 도쿠가와(德川) 집안의 ‘호사(蓬佐) 문고’에 소장된 조선 서적 142종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측은 “고서적 미술품 골동품 등은 한국의 국보인 만큼 법적으로 따지기 보다는 정치적인 견지에서 반환하라”면서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고서적에 애착을 갖고 있다”고 일본 측을 강하게 압박했다.

이에 대해 일본 측도 ‘약간의 성의’를 보임으로써 재산 청구권 문제로 팽팽하던 회담 분위기를 완화하고자 했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반도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이른바 ‘구보타 망언’의 당사자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일본 측 수석대표조차 1953년 10월 “일본 정부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약간을 양도(讓渡)하는 방안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이 밝히고 있듯이 일본이 생각한 ‘약간의 양도’는 약탈 문화재의 ‘반환’이라는 의무 사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이었고, ‘양도’의 범위도 “일본 정부가 보유 중인 것 가운데 선별해 일부만을 증여”하는 것이었다. 이마저도 ‘구보타 망언’으로 한일회담 자체가 장기간 중단되면서 없던 일이 됐다.

문화재 문제가 진전을 보인 것은 일본 측이 ‘구보타 망언’과 한국에 대한 이른바 ‘역청구권’ 주장을 철회함으로써 1958년 재개된 제4차 한일회담 때였다. 이때 일본 측은 과거 조선총독부가 발굴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삼국시대 고분1기(경남 창녕군 교동 소재) 유물 106점을 한국에 반환했다. 이와 관련, 고고학자 황수영은 “창녕군에 소재하던 고분 수백 기가 일제 때 전부 도굴되어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가 산일(散逸)된 상황에서 얻어 낸 일괄유물”이라고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106점 전부에 대한 금전적 가치는 일본 도쿄에서 매매되는 고려자기 우량품 1개의 시가인 20만엔 내지 30만엔 정도에 불과하다”고 저평가했다.

이후 문화재 문제를 둘러싼 한일회담은 ‘반환’의 법적 해석과 대상을 둘러싸고 전개됐다. 우선 일본 측은 한국 문화재가 일본에 건너온 것은 정상적인 상행위에 의한 것이 대부분으로 합법적이었다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 이는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 측의 기본적인 시각과도 관련되는데, 근대적인 법령이 정비되고 양호한 치안이 유지된 총독부 치하에서 전근대적인 탈취나 약탈 등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세키 유지로(伊關祐二郞) 당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조선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훌륭한 분들이므로 그냥 훔쳐 오지는 않았을 것이며, 기증받았거나 샀을 것”이라면서 “문화재 문제에 관해서는 국제법적 관례도 없다”고 말했다.

이에 맞서 한국 측은 문화재 유출이 도굴, 탈취에 의한 것이며 상거래라고 하더라도 위압적인 사회분위기하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매매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홍직은 “문화재 관련 법령이 갖춰지지 않았던 1905년부터 1915년까지 대규모 도굴이 이뤄졌다. 한국에는 무덤을 파헤치는 관습이 없으므로 그 대부분은 일본인이 자행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수영은 고대 분묘 매장물, 지상의 석조물, 사찰전래 문화재 등의 경우 전통적으로 모두 국유물이었므로 매매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한국 측은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인 만큼 ‘반환’이라는 명목으로 문화재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반면, 일본 측은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이 아니고 적어도 불법성을 입증할 수도 없으므로 반환이 아니라 문화협력의 차원에서 일본이 한국의 문화발전을 위해 ‘기증’하는 형식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은 가운데 중립적 용어인 ‘인도’(引渡)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합의됐다.

일본 측은 일본 정부가 보유 중이던 한국 문화재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돌려준다는 입장을 취했으나 이는 주로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품목에 한정됐다. 한일협정의 결과 한국이 돌려받은 문화재 1,432점도 대부분 이것들이다. 한국 측은 당초 도쿄대, 교토대 등 일본 국립대학 소장품도 반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 측이 난색을 표하자 결국 포기했다. 청구권 자금 규모를 둘러싼 협상이 급진전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에 문화재 문제는 그야말로 생색내기용 ‘장식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1965년 8월15일 이동원 당시 외무부장관은 한일협정의 비준국회에서 “일본이 가져간 귀중한 문화재, 특히 그중에서도 과거 일본 통감부 및 총독부가 수탈한 것을 전부 돌려받았다”고 강변했으나 한국은 이승만 정권 말기 ‘평화선’을 넘어온 일본인 어부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일본 측으로부터 겨우 목록을 받아 낸 경남 양산 부부총의 출토품마저 끝내 챙기지 못했다. 한국은 일본 궁내청 도서료(圖書寮) 및 내각문고에 소장된 한반도 유래 고서적의 본체가 아니라 그 마이크로필름을 건네받는 데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문화재 역시 대부분 반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1970년 유네스코는 ‘문화재의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에서 식민지기 문화재 이전을 “관련 당사국으로 복구시키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회담에서 돌려받지 못한 일본 소재 한국 문화재 문제 역시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대결 구도에 집착하기보다는 이러한 보편적 흐름에 기초해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동준 기타규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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