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생산물로 레시피 개발… 로컬푸드 저변 넓히기 나서
스페인을 일러 유럽의 키친이라고 한다. 지중해 해안가의 시골마을에 들어선 작은 식당이 어느날 미슐랭 쓰리 스타 레스토랑이 되고, 그 식당을 찾아 몰려드는 전 세계 미식가와 관광객들 덕분에 지역 경제가 살아난다. 그 음식은 다시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스페인을 세계 음식 트렌드의 수도로 만드는 선순환이 거듭되는 곳. 아직 한국에선 발생한 적이 없는 음식서사다.
지난해 11월 오픈한 국내 첫 미식여행 전문 회사 서울가스트로투어(대표 강태안)는 이 판타지 서사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설립됐다. 한국 음식을 즐기고자 하는 해외 미식가들을 위해 다양한 미식 여행 프로그램을 개발, 제공하는 이곳에서 요즘 공 들여 홍보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태안ㆍ서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태안반도는 사계절 풍부한 해산물에 품질 좋은 쌀이 있고, 천일염과 자염의 주요 생산지이자 고추, 마늘 등 한국의 대표적 향신채가 나는 곳이며, 한우가 맛있는 홍성과도 가깝다. 여기에 빼어난 바닷가의 풍광까지, ‘한국의 투스카니’를 방불케 하는 가능성의 미식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태안반도를 국내 첫 미식여행지로 부상시키기 위해 강 대표가 의기투합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사진작가 손현주씨다. 경향신문 음식전문기자 출신인 손 작가는 10여년 전 고향 안면도로 내려와 복합문화공간 형태의 펜션 ‘소무’를 운영하고 있다. 로컬푸드의 철학을 이 지역에 뿌리내리기 위해 유통이 불필요한 ‘푸드 마일리지 0㎞’를 목표로 매년 다양한 음식 행사를 개최해왔다. 각 분야의 셰프들을 초청, 태안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만을 사용해 한국식 파인 다이닝을 구현해보자는 것이 행사의 취지.
지난해에는 김은영 궁중요리연구가와 이현주 전통주 소믈리에 국가대표의 협업으로 ‘섬의 만찬 향수’라는 제목의 여섯 번째 코리안 파인 다이닝 행사가 열렸다. 애피타이저로 태안 특산품인 감태를 김가루 대신 얹은 ‘한 입 탕평채’와 태안 꽃게를 이용한 ‘게감정’(게의 등딱지를 떼고 속에 갖은 양념을 한 소를 넣어 만든 음식)을 내놓고, 메인으로 마늘 먹여 키운 태안 마늘한우와 안면도 찹쌀이 어우러진 ‘수삼 쇠고기 찹쌀말이’를 올리는 식이다. 태안 전역에서 많이 잡히는 살이 희고 쫄깃한 우럭을 살만 떠서 먹기 좋게 자른 후 밀가루 묻혀 튀기고, 여기에 사태육수를 부어 당면과 함께 내놓는 ‘궁중 우럭 면’도 조선 궁중요리 ‘승기약탕’을 태안식으로 재해석한 음식이다. 여기에 백련(白蓮) 하얀 연꽃 맑은 술, 구기주, 금산 인삼주 등 충남 전통주 6종이 각각의 요리와 어울리는 반주로 함께 상에 올랐다.
이렇게 개발된 레시피는 지역 식당들에 무상 보급, 공유한다는 원칙이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봄이면 꽃게, 가을이면 대하로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오는데 굳이 저 어려운 파인 다이닝을 시도할 필요가 없어서다. 손 작가는 “태안 지역은 식재료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미식이 발달하지 못하는 역설이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태안은 대한민국의 키친이 되기 충분한 지역이에요. 국토가 좁아 푸드 마일리지라는 개념 자체가 불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좋은 로컬푸드라는 건 분명히 있거든요. 누가 정직하게 건강한 식재료를 내놓는지 잘 알고 있고, 바로 걷어 올린 그 식재료로 그 지역의 셰프가 만들어내는 맛있는 요리, 그 요리가 유명해져 지역이 덩달아 발전하게 되는 그런 스토리가 언젠가는 태안에서 가능해질 거라고 믿어요.”
지금껏 열린 행사들은 주로 음식 전문가와 지역 및 각계 명사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서울가스트로투어와 손 작가는 미식투어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올 가을쯤 일반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태안ㆍ서산=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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