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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차라리 제대로 역사전쟁을 벌여라

입력
2015.05.1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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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 위기의 정체는 미일ㆍ중국 틈바구니서 복지부동하는 외교 자체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은 미국 등에 업고 중국과 사사건건 맞서게 될 것

한반도 영향 냉철히 보며 외교적 유연성 발휘해 우리식 '뉴노멀' 찾아야

최근 우리 외교를 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입만 쳐다보는 듯하다. 과거사를 덮는 게 소신인 아베의 입에서 ‘사죄’라는 말이 나오길, 아니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 듯하다. 이런 와중에 아베는 역사문제에 관한 한 우리와 한배를 탄 것으로 믿었던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만나 ‘미래지향’을 논의한 데 이어 최근에는 미국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그야말로 욱일승천하는 미일동맹을 과시했다. 믿었던 미국마저 일본을 두둔하다니, 한국만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고 난리가 났다. 특히 일부 동맹 지상주의자들은 한미동맹이 미일동맹을 왜 따라 하지 못하냐고 배 아파하고, 미국과 일본이 가까워져 한국이 고립됐다고 한탄한다. 일각에서는 이를 박근혜 정부의 외교 실패로 규정하고 윤병세 외교부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한국 외교가 위기인 건 맞다. 그러나 그 위기는 한국만이 외톨이가 된 듯한 일련의 정세 변화로 인한 상대적인 고립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위기의 본질은 미일동맹 강화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틈바구니에서 전략적 사고는커녕 거의 복지부동하고 있는 우리 외교 자체이다. 윤병세 장관은 지난 3월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건 축복”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런 ‘축복’이 결코 거저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더 중요한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런 축복은 우리 스스로 유연성을 발휘해 외교적 선택권을 확장해나갈 때 겨우 건질 수 있을까 말까 한 것이다. 자칫하면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일 외교는 이른바 ‘위안부 프레임’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일본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사죄를 하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국내적으로도 이를 공언한데다, 특히 국내정치가 성완종, 연금 파동 등으로 한창 꼬여 있고 정권 지지도가 바닥을 기는 상황에서 외교노선을 수정하는 것은 큰 부담이다. 그러나 ‘사죄 피로감’을 토로하며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아베의 일본이 한국이 정한 가이드라인에 호응해올 가능성 또한 현재로선 거의 없다. 이렇게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일본과 정상회담을 한 차례도 갖지 않았고, 어느덧 아베는 한국이 똥고집을 부린다며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투로 여유를 부리게 됐다. 이처럼 비정상인 모습이 오히려 정상인 것처럼 굳어지자 어떤 이는 한일관계에 ‘뉴노멀’(new normal)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국제정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아하지 않다. 오히려 불의(不義)가 판치는 세상이다. 아베의 폭주가 오히려 ‘뉴노멀’로 국제정치의 주류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과거 직시’를 토대로 한 미래지향이라는 우리의 주장은 정의롭지만, 이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주류 세계는 오히려 현실감각 없는 옹졸한 발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수의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아베의 역사수정주의를 강하게 비난했지만 이는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에서는 그야말로 작은 울림에 불과하다. 아베의 일본은 우리가 아무리 욕을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고, 이런 아베를 선택한 일본 국민들도 상당 기간 조마조마 불안해하면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의 돈과 군사력이 필요한 미국은 이런 아베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아베가 꿈꾸는 일본판 ‘뉴노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베와 오바마가 새로 정한 가이드라인은 일본 자위대의 작전 범위를 ‘주변 사태’에서 ‘전세계 사태’로 확대했다. 무장한 자위대가 이제 미군을 쫓아 전세계를 누빌 것이다. 아베는 2012년 말 재등판 이후 특정비밀보호법의 시행으로 국민의 알권리를 틀어막은 데 이어 ‘평화국가’ 일본이 자랑해온 무기수출금지 3원칙을 철폐했다. 미쓰비시 등 일본의 군수기업들은 물을 만난 듯 국제무기시장을 기웃거리고 있다. 사실상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산하에 편입된 일본판 NSC가 설치됐는가 하면, 헌법 해석을 변경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게 됐다. 여기에 외무성은 과거 ‘경제대국’ 일본이 뽐내던 공적개발원조(ODA)를 군사적으로 전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고, 방위성은 자위대에 대한 ‘문민통제’ 규정을 아예 폐지하는 방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전후’ 일본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은 미국을 등에 업고 팽창중인 중국과 정치, 군사, 경제 모든 면에서 맞서게 될 것이다.

이런 와중에 우리 외교가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미일동맹의 강화로 인해 미일 대 중국의 경쟁과 대결이 격화하는 가운데 한국이 취할 자세와 역할이다. 일본에게 칼을 쥐어준 미일동맹은 앞으로 더욱 무겁고 강하게 하위 파트너로서 한국의 기여를 요구할 것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체계 배치, 포괄적 한미일 정보공유 협정과 한일 군수협정 체결 등 이미 모습을 드러낸 목록은 일부에 불가하다. 아베의 불장난을 미국이 부채질하고 여기에 한국이 말려드는 사태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군사적으로 한미동맹에 의존하는 한국은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과 맞설 생각인가. 한국인 어느 누구도 미일과 중국이 연출하는 안보딜레마의 격랑 속에서 자신 있게 양자택일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축복이든, 재앙이든 닥쳐오는 운명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때 중요한 과제는 점점 커지는 국제정치의 불안정 요인이 한반도 평화나 안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볼 줄 아는 것이고, 국익에 기초해 외교적 유연성을 최대한 발휘해 나가는 것이다. 냉전의 논리가 판을 치던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 손으로라도 적과 손을 잡고 있으면 적이 쳐들어올지 어떨지 알 수 있다”면서 남북대화를 시작한 것도 바로 외교적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유연해야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재앙을 축복으로 돌릴 기회도 만날 수 있다. 우리의 운명을 논하는 큰 파티가 한창 열리고 있는데 근거 없는 장밋빛 낙관주의에 사로잡힌 채 초청장만 만지작거려서야 되겠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6월 열린다는 한미 정상회담이나 논의 중이라는 한중일 3국 정상회담보다 우선 아베가 꿈꾸는 일본판 ‘뉴노멀’을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베와 제대로 역사전쟁을 벌여도 좋다. 한일관계는 더 이상 망가질 것이 없을 정도로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역사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 정의롭다고 자신하는 한국이 꽁무니를 빼는 듯한 인상을 주는 ‘비정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 당당하게 맞서 따져봐야 하고 줄 것은 주되 챙길 것은 확실히 챙겨야 한다. 이것이 아베식 ‘뉴노멀’을 견제하고 우리식 ‘뉴노멀’을 되찾는 길이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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