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발단은 페이스북. 아아, 페이스북은 달콤한 유해물질. 친구가 좋아요를 누른 게시물이 떴다. ‘잇몸의 중요성’이란 설명글이 달린 그 게시물(▶ 확인하기)엔 사진이 여러장 첨부돼 있었다. 싱긋 웃는 미소가 아름다운 남자 모델의 사진이었다. 시크하게 살짝 미소 짓는 사진 뒤, 마지막 장이 반전이었다. 마지막 사진에서 그는 잇몸을 드러내고 파안대소 하고 있었다. 그는 실로, 잇몸 부자, 잇몸이 넓은 남자였다. 사람들 반응은 한 마디로 ‘확 깬다’는 것이었다. 꽃미모를 완성하는 ‘잇몸 (넓이)의 중요성’!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선홍빛 미소를 자랑하는 나로서는 마음에 작은 상처를 받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첫째론 저 환한 미소를 보고 사람들은 왜 잇몸을 분리해 보는가 생각했다. 웃는 모습과 멋진 빠쑝(?), 아름다운 뒷배경은 다 뒤로 하고 왜 잇몸에 돋보기를 대는가. 둘째론 ‘이젠 잇몸까지 적절한 크기를 따져야 하는가’ 하는 반발심이 들었다. 눈,코,턱,이마에 몸매까지 ‘적절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론 모자라단 말인가. 아침,저녁으로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시달리는 훈수다. 벽에 붙은 언니들은 180도 달라진 얼굴로, 네 턱의 각은 적절치 않다고, 네 이는 교정을 안 했으니 아직 ‘미완성’이라고, 네 몸매는 아직 더 들어갈 데가 있다고 부추긴다. 으, 이제 잇몸까지 왔나.
교환학생을 다녀온 친구들에게 물으면 외국 나가서 가장 좋은 점이 ‘해방감’이라 말했다.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기분. 무슨 옷을 입든 상관이 없고 여자다워야 한다거나 남자다워야 한다거나 하는 굴레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남들 몸무게에, 남들 외모에 훈수두기 좋아하는 사람들, 아시겠지만 한국에 참 많다. 그 미의 잣대도 아주 촘촘해서 신체 부위별로 나눠 분석도 가능하다. 허리는 에스, 가슴은 씨, 턱은 브이, 이마는 봉긋한 언덕의 씨 라인에 힙은 사과 같이 동그랗게 올라붙어야 한다 하여 애플의 에이. 무슨 알파벳 노래도 아니고.
미국으로 다녀온 친구 하나가 인상적인 얘기를 했다. 미국에서 여름을 보낸 친구는 ‘비키니 첫 경험’을 그 곳에서 했다. 비키니란 자고로 배꼽에 악세사리를 끼워도 파묻히지 않을, 효리 언니 같은 사람들이 입는 것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눈부신 그 곳의 해변에선 뱃살에 악세사리를 파묻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라는 것이다. 훌훌 벗고 마음껏 살을 태웠다고. 물론, 한국에서 다시 해변에 간 일은 없다. 여긴, 아무래도, 한국, 이니, 까.
“야! 네가 당당하면 되잖아!”
말은 쉬운데, 글쎄요. ‘왜 스스로 자기 몸을 인정하고 사랑하지 못하냐’는 훈수도 싫다. 남의 시선과 나의 시선을 어떻게 딱 떼어 분리하나. 아아, 나의 조국 코리아는 여기저기서 너무나 외모 지적을 많이 해. 지방흡입광고에선 사진 두 개를 놓고 ‘극혐’과 ‘존예’로 비교하더라. 하나는 뱃살이 있고, 하나는 뱃살이 없고.
대학 입학을 기다리던 겨울, 주변 친구들이 고대하던 거사들을 치루는 걸 봤다. 눈코턱 혹은 교정을 포함한 험난한 시술 혹은 수술은 문자 그대로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것이었다. 위험하고, 힘들고, 회복이 필요한 과정이었다. 수술을 결심하기까지 각자가 고민한 정도야 다르겠지만 성형 또는 시술을 굳이 감추지도 않았지만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꺼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최고는 티 안나게 마치 원래 조물주가 그렇게 쪼물쪼물 만든 듯 수술이 되는 것. 하루에 두 세 번씩 예뻐지란 메세지로 옆구리 찌르는 사회지만 티나게 ‘성형녀’,‘성형남’이 되는 건 또 흉을 본다. 강남에 가면 복제된 얼굴들이 역에서 내린다며 수군수군. 자기 몸을 사랑 못 하는 ‘성형괴물’이라며 수군수군. 그치만 아니다. 성형도 자기 몸을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길. 이런 저런 훈수는 관두고 자기부터 돌아보자. 내 안의 ‘예의 없는 태도’.
입이 방정. 입이 문제다. 외모 품평이 일상인데 이것부터 다들 관둬야 한다. 외모에 관한 수많은 훈수질. 이 세상의 모든 쓸 데 없는 충고는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로 시작한다. 대학교 1학년 때 제일 큰 폭격이 온다. 대학도 갔는데 이제 예뻐지고 꾸미라는 요구들. 너 생각해서 그러는데 화장을 좀 해보면 예쁠 거 같은데 왜 맨날 쌩얼로 다녀. 너 생각해서 하는 얘긴데 좀 여자애처럼 꾸며봐. 살도 빼고. 혹시 이 얘길 읽다가 찔리신다면 자기 반성 제대로 하시길 바란다. 나도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다. 남 외모 품평하고, 훈수 두는 거 예의가 아니다. 할 말이 없으면 그냥 침묵으로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이렇게 일상의 훈수쟁이들을 사라진대도 미모에 대한 압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외모도 경쟁력’이란 풍문과 구인구직란마다 적혀있는 ‘용모단정’의 조건 때문. 외모도 스펙이라고,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조커 카드!’ 이렇게 보는 시선도 있다. 꽃뱀이나 제비가 장래희망이라 그렇겠냐. 그런 특이군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비어있는 증명사진란을 바라보는 수많은 ‘일 구하는 청년’들은 알 수 없는 ‘용모 단정’의 기준을 가늠해보게 된다. 괜히 관상에서 책잡힐까 싶어 비싸게 돈 들여 증명사진도 찍고 그래본다. 외모가 경쟁력이란 건 곧, 사진관에겐 포토샵 능력이 경쟁력이란 말이 되었다. 토끼 이빨은 포토샵으로 잘라 작고 고른 이로 만들어주고 뾰족한 턱을 가진 남자에겐 다른 남자의 이쁜 턱을 떼어다 붙여준다. 사진 속 ‘복붙 미남미녀’ 탄생이다.
사진뿐이더냐, 몸무게에 키 묻는 문항까지 노골적이다. 숨겨왔던 신체 비밀을 왜 이력으로 적어내야 하는지 구직자야 알 길이 만무하고 기분만 나쁠 뿐이다. 남 외모에 훈수 두는 사람이나 이력서에서 몸무게 묻는 사람이나 다 ‘그래도 되지 않나’ 하고 별 의미 없이 콧구멍 후비며 하는 말들이다.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냥 묻거나, 그냥 하는 말인데, 그렇다면 진짜로 필요 없는 뱀발이니 잘라버리는 게 오히려 거동에 좋겠다. 으어어, 한국은 외모도 경쟁력이라 하는 창의 인재 육성국. 남들 외모 품평에 몸무게 품평이 아무 실례가 안 되는 우리의 동방예의지국. 이런 반어법 그만 실천하자. 과방, 동방에서 외모 훈수질 없애고, 이력서에서 사진란도 좀 없애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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