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약전(略傳)이라는 것을 쓰고 있다. 약전이란 굳이 따진다면 계보나 족보로 번역되는 단어이지만 작가들 사이에선 한 사람 인생을 간략하게 정리한 원고를 말한다. 간략하다고 했지만 한 권짜리 평전이나 전기문과 비교하여 그렇다는 말이다.
그 동안 친한 동료가 세상을 떴을 때 종종 써왔다. 이문구 선생의 단편 ‘유자소전’이나 박용래 시인 시집 ‘먼 바다’에 발문으로 붙인 ‘박용래약전’이 유명하다. 두 작품은 읽어보길 권한다. 재미있는 거 보장한다. 인용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못할 뿐이다. 이를테면, 정말 미운 사람이나 행위에 대해 선생의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장마철에 물걸레 보듯 했다’ 장마철 물걸레가 어떤 느낌인지 상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약전은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들 대상이다. 여러 동료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나는 2학년 1반 두 여학생을 맡았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의 삶을 듣기 위해 지지난 달 안산에서 두 학생의 부모를 차례대로 만났다.
나는 머리를 좀 길게 하고 다니는 스타일인데(물론 묶어야 할 정도로 길지는 않는다) 아이들 부모를 만나러 가기 전날 짧게 깎았다. 내가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머리를 깎은 것은 오래 전 외할머니를 만나러 섬에 가기 전에 그랬던 게 유일했다. 하도 잔소리를 해대니까 깎고 간 것인데 그때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이, 이발 좀 하고 오지 그랬냐.’
그리고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예의였고 조심이었다. 그러나 괜히 깎았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들도 나와 똑 같았으므로. 공연히 주눅 들고 긴장할 필요 없었으므로.
J의 엄마 아빠와는 식당에서 만나 소주도 한잔씩 나누고 길가 소파에 앉아 커피도 마셨다. S의 엄마 아빠와는 아이가 평소 자주 가던 북카페에서 만났다. 전해들은 아이들의 인생은 내 딸과 한 치도 다른 게 없었다. 가슴 졸이게 태어났고 병치레 한 두 번만 하고 쑥쑥 자란 다음 중학교 들어가기 무섭게 이마 잔뜩 가리는 헤어스타일을 했으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분명한 계획을 세우고 차곡차곡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나는 구형 핸드폰을 쓰기에 녹음 기능이 없다. 예전 마이크로 테이프를 사용하던 취재용 녹음기는 낡은데다 고장마저 나서 못쓰고 있다. 그래서 메모하느라 정신 없었다.
한 사람당 40매인 이 원고를 나는 두 달 째 쓰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10분 이상 쓰기가 어렵다. 내 새끼 같아서 감정이 복받치기 때문이다. 20여년 전 딸을 처음 만났을 때, 그 꼬물거리는 원숭이 새끼 같은 것을 안았을 때 나는 ‘내 아이는 특별하니까’ 라는 CF 카피가 얼마나 못돼 먹은 것인가를 절감했다. 내 아이가 특별하면 그만큼 남의 아이도 특별하다. 자기 자식만 특별하다고 여기는 인간들은 덜 떨어진 이들이다. 내남없이 무조건 소중한 존재, 그게 세상의 우리 아이들이다. 그러기에 모든 어른들의 보호와 사랑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내가 어려울 때 다른 어른이 그 역할을 해주는 것. 그게 필요해서 우리는 사회와 국가를 만들었다. 같이 사는 우리 편이라는 것을 확인 시켜주는 게 국가이고 사회 아니던가.
합동분향소 앞 플래카드 중에는 ‘어떻게 자식이 지겨울 수 있는가’가 있다. 세월호가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보인다. 철딱서니 없거나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특히 후자는 세월호를 이야기할수록 자꾸 찝찝하고 켕기는 이들이거나 그들의 하수를 받은 조무래기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하나 물어보자. 성완종 리스트가 세간에 난리다. 이권과 청탁, 비리, 검은 돈, 이익에 대한 목숨 건 탐욕, 이런 부정부패야말로 정말로 지겹지 않는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되풀이되는 이 구린내들 말이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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