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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 돈 세탁 창구인가 금융 약자 최후의 보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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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 돈 세탁 창구인가 금융 약자 최후의 보루인가

입력
2015.05.0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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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티 리저브社, 60억달러 돈 세탁"

이메일 주소만 있으면 계좌 개설

신불자도 금융거래 이용 가능하지만

범죄자 위한 거대한 은행으로 변질

세계 범죄자금 세탁 허브로 떠올라

가상화폐는 시대적 조류

기존 금융시스템에 정착방법 찾아야

국가안보 관련 범죄를 수사하는 미국 비밀경호국(US Secret Service)가 2011년 10월 전격적인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목표는 미국 시민 약 2억명의 개인정보를 불법 거래하는 베트남 남성 휴 민 엔고. 수천명의 범죄자들이 이름과 출생날짜, 사회보장번호 등을 담은 개인정보를 엔고로부터 구입한 후 이를 신용카드 개설과 불법 대출, 세금 탈루 등에 이용했다.

비밀경호국은 엔고를 검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실제 개인정보를 구매하려는 범죄자로 위장해 접근했다. 꼭꼭 숨은 엔고의 꼬리를 잡기위해 거래현장으로 불러내거나 금융 정보를 얻어내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비밀경호국이 돈을 입금할 그의 은행계좌를 요구하자 엔고는 이메일을 통해 짧은 답변을 보내왔다. ‘LR : U8109093로 돈을 보내주시오.”

숫자 8개는 엔고의 계좌번호이고 LR은 가상화폐인 ‘리버티 리저브’(Liberty Reserve)였다. 리버티 리저브를 거래하는 가상 은행을 통해 입금과 출금, 자금이체 등이 가능한 것. 리버티 리저브 거래에서 개인 사용자에게 요구되는 정보는 이메일 주소 단 하나뿐이다. 불법 거래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길 원하는 범죄자들에게 최적의 거래통로인 셈이다. 이를 계기로 미 검찰은 리버티 리저브에서 벌어진 자금 세탁 실체를 조사했는데, 리버티 리저브를“지하 범죄세계를 위한 거대한 은행”이라고 결론 지었다.

가상화폐를 이용한 서비스는 점차 전세계적으로 활성화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범죄자들의 자금 추적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가상화폐라는 새로운 시대의 조류가 밀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현실에 안착시켜야 할지 고민이 커지고 있다.

버티 리저브 목적은 ‘곤궁한 시민들을 위해’

2013년 5월 24일 리버티 리저브의 인터넷 홈페이지가 갑자기 폐쇄되자 전세계 범죄자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불법 거래 통로가 막힌 것은 물론 리버티 리저브에 막대한 불법 자금을 입금해 두었던 범죄자들은 하루 아침에 재산이 허공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리버티 리저브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용자는 전세계에서 100만명을 넘었다. 리버티 리저브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모든 관심은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바로 리버티 리저브 서비스의 설립자인 아서 부도프스키(42)였다. 이 모든 일을 시작한 그만이 사태를 해결할 열쇠를 쥐었기 때문이었다.

부도프스키는 1973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세탁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회계 담당자로 일했고, 아버지는 부도프스키가 2살 때 어머니와 이혼하고 집을 나갔다. 부도프스키는 어머니 손에서 외롭게 자랐고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아이였다.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미국 뉴욕주 브룩클린으로 이민을 갔을 때 부도프스키는 17살이었다. 미국으로 온 그는 심각한‘외부 혐오증’(outside phobia)이란 정신병을 앓기 시작했다. 길거리에만 나서면 멀미와 구토를 느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부도프스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컴퓨터였다. 부도프스키의 어머니인 이리나는 “아들은 하루 24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면서 “부도프스키가 컴퓨터 전문가로 일을 시작하면서 그의 병도 낫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부도프스키의 인생은 러시아계 친구인 블라디미르 카츠를 만나면서 급변했다. 이들은 1990년대부터 전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컴퓨터 열풍에 심취해있었고 특히 가상화폐(digital currency)에 관심이 많았다.

가상화폐를 전자 상거래에 처음 도입한 사람은 미국 플로리다에서 방사선 종양학자로 일하던 더글라스 잭슨이었다. 잭슨은 1996년 ‘이 골드’(e-gold)라는 가상화폐를 만들었는데, 가상화폐와 금을 연동시키는 금태환(金兌煥)제를 이용했기 때문에 이 골드는 금융시장의 급격한 환율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부도프스키와 카츠는 2002년에 ‘골드 에이지’라는 가상화폐 교환소를 사들여 이 골드를 현금과 교환해주고 2~4%의 수수료를 챙기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사업에 발을 들였고, 이는 독자적인 리버티 리저브 서비스 설립으로 이어졌다. 부도프스키는 리버티 리저브를 미국 달러와 연동해서 자산 안정성을 높였다.

부도프스키는 “은행계좌나 신용카드를 가질 수 없는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전세계에 25억명 가까이 된다”며 “현대 금융시스템에서 배제된 그들이 리버티 리저브를 통해 편리한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며 리버티 리저브 서비스를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세계 범죄자들의 뒷거래 자금 통로로

하지만 리버티 리저브 서비스는 부도프스키의 포부처럼 운영되지만은 않았다. 2001년 미국에서 9ㆍ11 사태가 발생하면서 미 행정부는 테러리스트와 범죄자들에게 악용될 수 있는 은밀한 자금 세탁과 유통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 의회는 2001년 애국법(Patriot Act)을 통과시켜 재무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자금 거래를 엄격하게 규제했는데 리버티 리저브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부도프스키는 리버티 리저브의 본사를 세금회피 지역으로 유명한 코스타리카에 설립해 미국의 법망을 피했다. 부도프스키는 “기존 금융 시스템에서 탈피한 가상화폐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 정부는 부도프스키가 범죄적 의도를 지녔다고 판단했다. 코스타리카는 전세계 범죄자들의 자금 세탁으로 유명한 국가다. 비영리 금융감시 단체 글로벌파이낸셜인테그리티(GFI)에 따르면 코스타리카의 자금세탁 규모는 2006년 54억달러에 달했고, 2012년에는 216억달러까지 치솟았다. 자금 거래에서 개인정보를 요구하지 않는 리버티 리저브가 코스타리카에 둥지를 트는 순간 전세계 범죄 자금 세탁의 허브로 떠오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또 부도프스키는 본사는 코스타리카에 두면서도 자금 거래 등을 처리하는 컴퓨터 서버는 네덜란드에 설치했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고용했다. 사실상 리버티 리저브를 다국적 기업으로 만들어 미국 등 특정 국가의 범죄 수사를 어렵게 만든 셈이었다. 코스타리카는 국제적 협약에 따른 범죄인 인도 정책에도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자인 부도프스키도 코스타리카에 있는 한 미국으로 송환될 염려도 없었다.

특히 가장 의심스러운 점은 부도프스키가 자신이 리버티 리저브의 소유주임을 철저히 숨긴 사실이다. 부도프스키와 함께 리버티 리저브를 설립했던 친구 카츠는 2009년 막대한 퇴직금을 받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 부도프스키가 리버티 리저브의 단독 소유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부도프스키는 ‘에릭 팔츠’라는 가명으로 사업 활동을 하며 본사 직원들에게조차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AP는 “리버티 리저브는 자금 세탁 혐의로 미 재무부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면서 “부도프스키는 수사망이 좁혀올 경우를 대비해 리버티 리저브와 자신의 관계를 숨기고 싶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다국적 금융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의 글로벌 불법금융팀(GIFT)은 2011년 리버티 리저브를 세계 최대의 자금세탁 기업으로 지목하고 작전에 돌입했다. 코스타리카에서 나오지 않던 부도프스키가 2013년 5월 모로코로 휴가를 떠나자 GIFT는 이 틈을 이용해 경유지인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그를 전격 체포했다. 이후 미국 정부는 코스타리카 정부의 협조를 얻어 리버티 리저브 본사 등에 대한 전방위 압수수색을 벌였다. 조사결과 리버티 리저브의 개설 계좌 중 32개는 대규모 도난 신용카드 거래와 관련돼 있었고, 117개는 금융 다단계 투자 사기인 ‘폰지 범죄’에 이용됐다는 것이 드러났다. 부도프스키는 올해 말 미국 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서 30년 징역형을 선고 받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리버티 리저브 폐쇄 이후 남은 과제

리버티 리저브가 범죄자금 세탁 창구라는 악명을 떨치게 됐지만 가상화폐가 남긴 금융거래 편의성 등의 가능성은 과소평가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사실 리버티 리저브 뿐만 아니라 많은 다국적 대형은행들도 폰지 범죄 등에 이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또 미국 검찰은 리버티 리저브가 총 60억달러(약 6조4,872억원)의 범죄 자금을 깨끗한 돈으로 세탁했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내놓지 못했다. 이에 대해 부도프스키는 “리버티 리저브를 범죄에 악용하는 사람들은 전체 이용자 100만명 중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특히 부도프스키는 최근 미국에서 급격한 세력 확장을 보이고 있는 송금 전문업체 웨스턴 유니온(Western Union)이야말로 범죄단체의 최대 자금 창구로 활용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웨스턴 유니온은 900달러 이하 거래에서는 어떠한 개인정보 확인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뒷거래를 하기에 용이하다는 지적이었다. 실제 가상화폐 서비스는 별다른 정부 감시 없이 이뤄지기 때문에 계좌 잔액 등의 조작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고,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돈이 휴지조각으로 변할 수 있을 정도로 금융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가상화폐보다는 정부의 인증을 받는 송금업체들을 더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부도프스키는 가상화폐를 범죄자금 세탁의 온상처럼 여기는 것은 편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가상화폐를 통한 자금거래는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인 만큼 리버티 리저브처럼 가상화폐 서비스를 폐쇄하는 것이 답이 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부도프스키는 “신용불량자 등 기존 금융 거래를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리버티 리저브는 최후의 보루”라면서 “가상화폐를 이용한 금융시스템을 기존 금융질서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정착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뉴욕타임스에 밝혔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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