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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신동(神童)의 미래

입력
2015.05.0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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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신동으로 유명한 인물은 ‘김오세(金五歲)’라고 불렸던 김시습(金時習ㆍ1435~1493)이다. 다섯 살 때 세종에게 비단을 하사 받은 데서 나온 별명이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 이건창(李建昌)의 ‘명미당집(明美堂集)’에는 ‘설악산 오세암 장경비각(雪嶽山五歲菴藏經閣記)’이란 글이 있다. “설악산에 오세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문절(文節) 김선생의 옛 거주지다. 세상에 전하기를 선생은 신동으로 임금께 나아가서 뵙고 비단을 내려 받아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 후에 장대해졌지만 사람들이 오히려 김오세라고 불렀다.”

다섯 살 때 임금에게 인정받은 김시습의 인생은 보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김시습의 문집인 ‘매월당집’ ‘유적수보(遺蹟搜補)’에는 “삼각산에서 공부하던 김시습이 단종의 손위(遜位) 소식을 듣자 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지 3일 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버리고 미친 듯 더러운 곳간에 빠졌다가 그곳에서 도망하여 행적을 불문에 붙이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개인적 출세 대신 사회적 정의감에 불타면서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크게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가 그 좋은 머리로 수양대군 편에 섰으면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누렸겠지만 후세의 존경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국의 유명한 신동은 항탁(項?)이다. 항탁(項託)으로도 쓰는데 ‘회남자(淮南子)’ ‘수무훈(脩務訓)’에는 “무릇 항탁은 일곱 살 때 공자의 스승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의 말을 경청했다”는 말이 있다. 공자가 성인으로 떠받들어지면서 항탁은 더욱 관심 인물이 되었다. 김시습이 주석하던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부른 것처럼 항탁이 살던 산을 소아산(小兒山)이라고 불렀다. 여방(?芳)이 지은 ‘소아묘기(小兒廟記)’에는 “일조(日照)읍 서남쪽에 소아산이 있는데 승려들의 전설에 따르면 대개 공자가 소아에게 물어본 곳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소아산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일조현(日照縣) 서남쪽에 있는 산인데 ‘일조현지(日照縣志)’ ‘산천(山川)’조는 “소아산은 일조성 서남쪽 80리에 있는데…아래에 소아묘(小兒廟)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돈황변문집(敦煌變文集)’ 3권의 ‘공자항탁상문서(孔子項託相問書)’에 따르면 공자가 “좋도다, 좋도다. 나는 너와 함께 천하를 주유하고자 하는데 같이 갈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항탁은 “나는 같이 주유할 수 없소. 내게는 엄부(嚴父)가 계시니 마땅히 모셔야 하고, 내게는 자모(慈母)가 계시니 마땅히 봉양해야 하고, 내게는 형이 있으니 마땅히 순종해야 하고, 내게는 어린 동생이 있으니 마땅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그대를 따라서 갈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사기’ ‘감무(甘茂)열전’에는 감무의 손자 감라(甘羅)가 진(秦)나라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에게 “항탁은 일곱 살 때 공자의 스승이 되었는데 신은 지금 열두 살입니다”라면서 조(趙)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다섯 성을 떼어 받아 왔다는 고사가 전한다.

조선에서 천재 계보로 유명한 가문이 성호(星湖) 이익(李瀷) 집안이었다. 그의 종손 이가환(李家煥)에 대해 정약용이 당시 사람들이 귀신이라고 불렀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이익은 ‘성호사설’의 ‘신동’이란 글에서 신동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이익은 우리나라 신동으로는 김시습과 이산해 두 사람을 들었다. 조선 중기 학자 권응인(權應仁)은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이산해는 초츤(??ㆍ7, 8세)이 되기도 전에 큰 글씨를 써서 사람들이 이를 얻으려 몰려들었다. 글씨를 다 쓰고 나면 발에 먹을 묻혀 종이 끝에 찍으니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익은 “사람이 어려서 통달했다고 해서 반드시 현명한 것은 아니다”면서 “오랫동안 경험한 결과 어려서 밝고 뛰어났던 수재가 점차 장성해서는 그 빛나는 문장이 줄어드는 것을 봤으니 그래서 원대하고 큰 그릇은 드문 것이다”고 말했다. 어려서나 장성해서나 천재인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이익은 “공명과 사업이 반드시 어릴 때 천재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해서 천재가 업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입시에 내모는 우리 사회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출세보다 진정한 가치 추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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