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에 유명한 장면이 있다. 실연당한 양조위가 허한 마음을 달래려 칫솔이나 비누 등에게 말을 거는 장면. 그걸 보면서 내 표정은 아픈 어금니를 악물거나 구토가 올라오려는 걸 간신히 참는 사람처럼 변했다. 자취집에서 혼자 비디오로 감상하던 참이었는데, 그 장면 이후 자꾸 시선이 주변 사물들에게 향했다. 배터리가 떨어진 알람시계와 보풀이 일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베개 따위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그것들은 한참이나 뇌리에 떠올랐다. 베개를 베고 누워있으면 베갯잇이 서서히 벗겨지면서 어떤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멎었던 시계바늘이 갑자기 돌아가면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숟가락 젓가락이 느릿느릿 걸어 다니거나 줄 끊어진 채 먼지를 덮어쓰고 있는 기타가 저절로 어떤 멜로디를 흘려 보내는 환청을 듣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때 심정이 어떠했는지 기억 안 난다. 슬펐는지 기뻤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런 혼미한 환각에 빠져서 바라본 사물들의 형태가 곡진하게 여겨졌다는 사실만 또렷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먼저 무슨 말을 걸었던 것일까. 문득 제정신으로 바라본 사물들은 분명했고, 고요했다. 그 침묵을 통해 또렷이 환기되는 내 감정의 형태를 나는 바라봤던 건지 모른다. 네모나거나 동그랗거나 푹신하거나 단단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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