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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獨·蘇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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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獨·蘇전쟁이었다

입력
2015.05.0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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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서부전선, 獨 2급 수준 59개 사단만 배치

피 튀기는 동부전선, 전쟁 중 전사자 90% 소련군에 당해

승리의 주역은 소련, 흐름 바꾼 전투는 늘 동부서 벌어져

유럽 동부 전선에서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을 수행하던 소련군이 부교를 건너고 있다. AP 연합뉴스
유럽 동부 전선에서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을 수행하던 소련군이 부교를 건너고 있다. AP 연합뉴스

1939년 9월 1일부터 여섯 해 동안 남극을 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역(戰域)은 연합국과 추축국이 맞선 유럽ㆍ지중해 전역과 연합국과 일본군이 맞선 동아시아ㆍ태평양 전역으로 양분된다. 유럽 전역은 다시 영미군이 독일ㆍ이탈리아와 대적하는 서부전선과 소련군이 독일군과 대적하는 동부전선으로 나뉜다.

여기서 우리나라에 상영되어 인기를 끈 2차 세계대전 영화를 떠올려보자. 최근만 해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퓨리’ ‘밴드 오브 브라더즈’ ‘더 퍼시픽’ ‘씬 레드 라인’ ‘윈드토커’ ‘진주만’이 있다. 1990년대 이전의 영화까지 덧붙이면 목록이 무척 길어진다. 그런데 이 목록에서 독소전쟁 영화를 찾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21세기에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20세기에는 ‘철십자 훈장’이 있을 따름이다. 영화의 엄청난 파급력을 고려하면, 우리나라에 형성되어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이미지에서 유럽 동부전선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세 전선의 비중을 다시 따져볼 필요가 여기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 전역은 아무래도 동아시아보다는 유럽이었다. 인력과 물자의 규모 면에서도 유럽 전역이 동아시아 전역을 압도했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전화가 타오르는 지역은 광활했지만, 투입된 병력과 물량의 규모는 유럽 지중해 대서양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았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던 미국은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유럽 전역의 서쪽도 비교적 조용했다. 1940년 5,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너무나도 하릴없이 무너진 뒤 유럽 본토에서는 1944년 6월까지 유의미한 대규모 지상전이 없었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는 선단을 공격하는 독일 잠수함과 영국 해상함대가 대서양에서 벌이는 대결은 영국의 입장에서야 사활이 걸렸을지 몰라도 대전의 흐름을 결정하는 결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지역을 상대로 영국과 미국이 수행하는 전략폭격도 마찬가지였다. 그 항공 폭격이 독일의 전쟁수행 기구에 미치는 영향은 단기적으로는 미미했고 장기적으로도 그리 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1943년 5월까지 독일의 롬멜 장군, 영국의 몬트고머리 장군, 미국의 패튼 장군이 대결하는 북아프리카 전선의 지상전 규모는 사실 보잘것없었다. 영미군을 곤경에 빠뜨리던 독일의 아프리카군단 병력은 4개 사단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유럽 동부전선의 스탈린그라드에서만 소련의 붉은 군대는 200개 사단을 훌쩍 넘는 독일 최정예 병력을 상대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관심이 온통 소련군을 무너뜨리는 데 쏠린 탓에 보급을 받지 못해 휘발유 대용으로 독주를 증류해서 추출한 알코올로 기갑차량을 굴리던 독일군 아프리카군단이지만 영미군을 쩔쩔매도록 만들던 곳이 북아프리카였다.

1941년 가을에 영국의 처칠 총리는 마운트배튼 제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관은 유럽 침공을 준비하게 될 거요. 우리가 유럽에 상륙해 히틀러와 싸워 그의 군대를 지상에서 물리칠 수 없다면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영미군이 유럽 본토에서 본격적인 지상전을 벌이게 되는 데에는, 다시 말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행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세 해가 걸렸다. 1943년 여름에 영미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발을 디뎠지만, 처칠의 바람과는 달리 북상 속도가 워낙 달팽이 걸음인지라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에 결정타를 가하기는커녕 독일에게 솜방망이를 휘두르는 격이었다. 1944년 6월 6일까지 유럽의 서쪽 땅은 잠잠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그 동안 유럽의 지상전은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었을까? 피가 튀고 뼈가 꺾이는 접전이 일어나는 지역은 동부전선이었다. 독일이 소련을 기습 공격한 1941년 6월 이후로 두 나라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병력과 물량을 투입하며 1945년 4월말까지 사투를 이어갔다. 1942년에 독일은 동부전선에 260개가 넘는 정예 사단을 배치한 반면에 서부전선에는 2급 수준의 59개 사단을 배치했다. 그 59개 사단 가운데에는 소련군과 격전을 치르느라 진이 빠진 심신을 추스르고자 프랑스로 이전 배치되어 휴양을 취하는 사단이 여럿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소련군은 독일군 최정예 병력의 5분의 4를 대적했다.

동원된 인력과 물자의 규모 면에서도 동부전선이 서부전선을 압도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전투도 늘 유럽의 동부전선에서 벌어졌다.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굶어 죽는 와중에도 끝끝내 버텨내어 전선을 유지한 레닌그라드 봉쇄전, 독일군의 불패 신화를 깨뜨린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독일군의 주특기인 기갑전에서 오히려 독일군을 압도한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이 얻어낸 승리는 하나하나 다 전쟁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어떤 이들은 1944년 6월 6일에 개시된 영미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제2차 세계대전과 더 나아가 “현대 세계사의 분수령”으로 일컫는다. 하지만 D-데이는 서부전선의 분수령일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도입부에 나오는 오마하 해변의 전투 장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D-데이에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 가운데 24시간 안에 목숨을 잃은 전사자는 2,000명 안팎이었다. 이런 수준의 인명 피해는 동부전선에서는 피해는 축에도 끼지 못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노르망디에 발을 디딘 연합군은 독일군의 반격에 밀려 두 달 동안 해안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을 거듭했다.

한편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 불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실상은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의 동쪽에서 소련군이 수행한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과와 확연히 대비된다. 1944년 6월 22일부터 8월 19일까지 북으로는 발트해에서 남으로는 흑해까지 1,000㎞에 걸친 전선에서 소련군 240만명이 독일군 중앙집단군 120만명을 들이쳐 700㎞를 전진했다. 스몰렌스크에서 폴란드의 바르샤바 코 앞까지 성큼 다가선 셈이다. 이로써 스탈린은 전쟁의 주도권을 틀어쥐었다.

한 해 전에 벌어진 “사상 최대의 기갑전”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스탈린은 1943년 말에 이란 테헤란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를 만나 회담을 했다.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에 스탈린은 주코프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즈벨트가 1944년에 프랑스에서 광범위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겠다고 확약을 했어. 루즈벨트는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히틀러의 독일을 쳐부술 힘이 충분히 있지.”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대비되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대성공은 스탈린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입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전투 중에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힌 독일군인의 수가 1,350만명인데, 이 가운데 80%에 해당하는 1,000만명이 동부전선에서 나온 피해였다. 독일군 전사자의 90%가 소련군에게 당한 것이기도 했다. 소련 860만, 독일 325만, 일본 120만, 이탈리아 33만, 영국 32만, 미국 26만이라는 전사자 수만 따져보더라도 각 교전국의 피해 정도가 드러난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유럽에서 전사한 미군은 10만명인데, 1945년 4월 전쟁의 막바지에 베를린 점령하는 작전에서만 소련군 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럽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에 스탈린은 그답지 않게 상념에 잠겨 주코프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전쟁이지. 전쟁이 우리나라 사람 목숨을 얼마나 많이 앗아갔는가. 우리나라에는 일가친척이 죽지 않은 집안이 십중팔구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걸세.” 스탈린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전쟁 동안 동원된 소련 군인 3,450만명 가운데 죽거나 크게 다치거나 적에게 사로잡힌 이가 2,900만명을 웃도니, 그 비율이 무려 84%를 넘는다. 1998년에 인터뷰를 요청한 미국인 역사가에게 한 참전 소련 군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소련이 겪은 인명 피해의 실상을 생생히 알려준다. 우크라이나의 시골 마을에서 자라면서 학교에 다닌 자기 또래 동무 100여 명을 다 알고 지냈다는 그 참전용사는 그 동무들 가운데 92명은 전선에서 죽고 6명은 불구의 상이용사가 되어 귀향했고 자기만 몸 성히 살아남았다고 술회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의 패배에 가장 큰 이바지를 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그러나 이 자명한 사실이 20세기 후반 냉전 시대에 이념 대결이 벌어지면서 자본주의 진영에서 감추어졌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자 추이코프 소련군 장군은 처칠이 써서 노벨상을 받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의 수천 쪽 중에서 동부전선에는 겨우 열 몇 쪽이 할애되었다고 투덜댔다. 냉전이 끝난 지 한 세대가 되는 지금 누누이 진상을 가릴 필요는 없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우리나라에도 독소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좋은 외국의 학술서가 여럿 번역되어 많이 바로잡히기는 했어도,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유럽 전역 동부전선의 역할을 터무니없이 과소평가하는 기운이 쉬이 가시지 않고 있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 유럽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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