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 복식 금메달로 병역 혜택, 병무청 신검 받고 곧 4주 훈련
작년 US오픈 예선 1R 승리, 랭킹 급상승 기폭제 된 듯
당장 이길 수 있는 선수 만나기보다 톱10과 겨루면서 경험치 쌓고 싶어
곱슬머리가 수북하게 자란 정현(19ㆍ삼성증권 후원)이 인터뷰를 재촉했다. 인터뷰 직후 잡힌 훈련에 늦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달 30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테니스코트에서 한달 보름여 만에 귀국한 정현을 만났다. 이틀 앞서 귀국한 정현은 머리를 깎을 새도 없이 언론사 인터뷰, 병무청 신체검사, 국내 적응 훈련까지 소화하는 중이었다. 전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프로 테니스 선수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하지만 정현에게는 더 없이 신나는 일이다. 마치 죽 세워진 도미노를 차례로 쓰러뜨리듯 호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2013 윔블던 주니어 단식 준우승,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복식 금메달, 2015 ATP 1000시리즈 마이애미 오픈 1승까지 ‘무한질주’를 해왔다. 지난 27일 발표된 ATP 랭킹에서는 88위로 뛰어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해 초만 해도 500위 권을 맴돌던 데 비하면 ‘퀀텀 점프’(Quantum Jumpㆍ대약진) 성장이다. 한국 남자 선수가 랭킹 100위권에 진입한 것도 이형택(39) 이후 두 번째다.
비인기종목인 한국 테니스에도 정현은 단비와 같은 존재다. 주원홍(59) 대한테니스협회장은 “ATP랭킹 100위권 진입은 남자테니스에서 일종의 ‘고시 패스’와 같은 의미”라며 “세계 무대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인증서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했다. 이제 우리 나이로 갓 스무 살 문턱을 넘어선 정현은 4대 메이저 대회(호주, 프랑스, 윔블던 US오픈)첫 승을 너머 보다 더 큰 꿈을 그리고 있다. 이하 일문일답.
-랭킹 88위를 확인하고 맨 먼저 들었던 생각은 무엇인가. 그리고 ‘신변’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페이스북에 올라온 기사를 보고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ATP 홈페이지에 직접 들어가서 랭킹을 확인해 본 것은 아니었다. 뿌듯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100위 안에 들었구나, 100위 안에 들 수도 있구나…. 믿기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사실 올해 100위 안에 들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그전까지는 랭킹보다는 경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처음 100위가 사정권 안에 들어왔을 때는 랭킹 포인트에 신경을 쓰면서 시합에 나섰다.”
-2013년 윔블던 단식 준우승 때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윔블던 준우승 때 주변에서 연락을 더 많이 받았다. 그 때는 주니어였고 모든 게 신기하고 얼떨떨했다. 하지만 100위 안에 들었을 때는 자신감이라는 게 생긴 것 같다. 그 동안 많은 걸 경험했고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랭킹이 ‘폭풍 점프’했는데 기폭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지난해 8월 US오픈 예선전 1경기를 이긴 것부터 시작된 것 같다. 이후 처음으로 챌린지 (ATP투어보다 한 등급 낮은 대회) 우승을 하면서 랭킹이 상승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고 나서부터 한 층 자신감이 붙었다. 동계훈련을 잘 마무리 했고, 그래서 2월 호주에서 열린 맥도날드 버니 인터내셔널 챌린지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상승세는 지난해 US오픈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귀국하자마자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았다고 들었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기분이 어땠나.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4주 훈련만 받는다. 복식 파트너였던 임용규 형이 먼저 훈련을 마쳤는데, 굉장히 생활을 잘 했다고 들었다. 조용히 지내다가 오겠다.”
-인천공항 귀국 때 보니 스타일에도 부쩍 신경을 쓴 것 같다.
“그냥 내 취향대로 입었다. 해외 시합때는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다녀서 항상 헤어 스타일이 눌려 모자를 가지고 다닌다.”
-지금까지 가장 가슴을 쓸어 내린 경기가 있다면.
“인천 아시안 게임이다. 경기 끝나고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데 쳐다보기가 힘들어서 결국 끝까지 보지 못했다. 현실에서는 이겼지만 영상 속에서는 왠지 질 것 같아 무서웠다. 지다가 간신히 이겼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애미 오픈 1회전에서 랭킹 50위의 마르셀 그라노예스를 꺾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나. (한국 남자 선수가 ATP투어 대회에서 승리한 것은 2008년 9월 이형택 이후 처음이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상대가 우승 타이틀도 몇 개 있고, 최고 랭킹 19위까지 올라갔던 선수였기 때문에 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하니까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2회전 토마스 베르디흐(랭킹 7위)와 맞붙었을 때도 마음이 편했다.”
-베르디흐와 경기할 때는 마치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큰 무대가 부담스러웠나.
“베르디흐는 동영상을 통해서 많이 공부해왔던 선수 중 한 명이다. 처음으로 내가 영상을 찾아보던 선수와 대등하게 시합을 하니까 마치 텔레비전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대회 분위기도 챌린지와 확실히 달랐다. 관중도 많았고 어린 나를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았다. ‘한 게임이라도 더 따자. 최대한 붙어 보자’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두 번째 세트에서 이기고 있다가 져서 아쉽긴 하다.” (정현은 2세트 게임스코어 4-1까지 앞서기도 했다.)
-주변에서 벌써 정현을 한국 테니스의 대들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부담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한다. 언젠가 이겨내야 하는 부담감이고, 일찍 이겨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속팀 삼성증권이 테니스단을 해체한 뒤, 정현의 집중 육성을 택했다.
“팀 해체 소식을 접하고 (충격 때문에)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같이 있을 때 운동 분위기도 좋았고 재미있었다. 주변 어른들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조언해 주셨다.”
-랭킹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모든 이들이 1위를 꿈꾸겠지만 지금은 성장 과정이기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 랭킹에 집착하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니 모든 게 잘 풀렸다. 지금도 순위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올해 목표는 메이저대회 1승이다.”
-현역 선수 중 롤모델이 있다면. 그리고 일본의 니시코리 게이와 자주 비교되는데.
“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다. 정신력이 가장 강한 선수로 보인다. 풀세트 접전 중일때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은 조코비치가 최고다. 니시코리의 경기를 보고 나서 아시아권 선수들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동양인이라고 해서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럽 선수들의 타고난 파워는 노력해도 따라가기 힘든 게 사실이다.”
-6월 윔블던 단식 본선진출이 확정됐다. 가장 겨뤄보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톱10 선수들과 맞붙고 싶다. 지금은 이길 수 있는 선수보다는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붙어야 하니까. 피하고 싶은 상대라 생각했는데 이기면 그만큼 자신감이 생긴다.”
-닉 키르기오스, 보르나 코리치 등 같은 10대 신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겨뤄볼 만한 상대가 있다고 생각하나.
“모든 선수들이 다 해볼 만하다. 랭킹 1,2위를 제외하고는 정신력이 다를 뿐 실력은 엇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상위권은 기술적인 면도 좋긴 하지만 정신적인 면이 훨씬 뛰어난 것 같다.”
-윔블던 1회전에서 지기만 해도 상금이 4,700만원이라는데, 이 돈을 어디에 쓰고 싶나.
“상금을 목표로 시합하지 않는다. 상금은 다 부모님 통장으로 들어가 실제 손에 쥐는 돈은 별로 없다. 용돈은 몇 만원이 전부다.”(웃음)
이현주기자 memory@hk.co.kr
금보령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