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7시30분쯤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한 ‘상영관’을 찾았습니다. 금암동에 위치한 극장의 입구부터 낯설었습니다. 콘크리트에 큼지막하게 하얀 글씨로 ‘Gate3’라 적힌 문을 지나 들어가니 바로 우레탄트랙이 밟혔습니다. 육상선수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축구골대를 옆으로 두고 잔디를 좀 밟은 뒤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았습니다. 특설극장은 2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람석으로 둘러싸여있었습니다.
이쯤이면 눈치 채셨지요? 이날 찾은 곳은 전주종합경기장에 설치된 전주영화제 야외상영관이었습니다. 선수들이 잔디와 트랙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땀을 배출하던 곳에 극장이 들어선 것이지요.
오후 8시 ‘극장’ 안의 불이 꺼지고 대형 스크린에 미국 음악영화 ‘러덜리스’가 영사되기 시작했습니다. 스크린을 바라봤을 때 왼쪽에 위치한 성화대가 스크린이 반사한 빛에 너울거렸습니다. 전국체전 등이 개최될 때마다 뜨거운 화염을 뿜었던 성화대도 야외 영화 감상에 취해있는 듯했습니다. 이날 4,000석 간이의자의 3분의2가 채워졌습니다. 유명가수가 스타디움에서 공연하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영화상영은 매우 드뭅니다. 소리가 운동장 안을 맴돌며 대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음악이 왜곡돼 아쉬웠으나 ‘운동장 안 극장’이 주는 정취는 남달랐습니다. 관람석이 둘러싸고 있어 안온했습니다. 간혹 부는 밤바람이 일찍 찾아온 여름의 열기를 낮추었습니다. 영화와 함께 5월의 밤하늘까지 만끽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사실 전주종합경기장은 전주시의 애물입니다. 전주월드컵경기장이 생긴 뒤 프로축구팀 전북현대가 떠나면서 이용 횟수가 줄었습니다. 프로야구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해체 뒤 쓰임새가 없어진 바로 옆 야구장과 함께 처치 곤란한 도심 골치거리가 됐습니다. 대대적인 재개발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부수고 새로 지어도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전주시는 재개발에서 재활용으로 눈을 돌리는 모양새입니다. 전주영화제 기간 중 야외 상영장으로의 변신이 종합경기장의 재활용 가능성을 알아보는 시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주영화제는 지난달 30일 열린 개막식도 종합경기장에서 치렀습니다. 선수들이 입장하던 문으로 배우와 감독 등이 들어서며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습니다.
야외상영은 전주영화제만의 전매특허는 아닙니다. 국내외 많은 영화제들이 야외상영을 대표 상품으로 내세우며 영화제 알리기에 골몰합니다. 올해 스무 살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도 야외상영으로 대중들의 눈을 사로잡은 영화제입니다. 10월의 밤 수영만요트경기장에 설치된 상영장에서 개막식을 열고 개막작을 상영하며 낭만을 선사했습니다(부산영화제는 2011년부터 부산영화의전당에서 개막식을 열고 있습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도 야외상영으로 영화팬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청풍호반(충주호) 야외에 상영장을 마련해 여름 밤의 정취를 전합니다. 프랑스 칸국제영화제는 바닷가에 스크린과 의자를 설치해 관광객들을 호객합니다. 스위스 로카르노국제영화제는 로카르노 중심 광장에서의 영화 상영으로 유명합니다.
전주영화제도 전주삼성문화회관 앞 등에서 야외상영을 해왔으나 별다른 개성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고사동 영화의거리는 극장과 맛집이 몰려있어 영화감상에 제격이라고 하나 전체적인 공간이 비좁게 느껴진다는 평도 받았습니다. 운동장을 극장으로 만들어낸 과감한 시도가 전주영화제의 또 다른 매력으로 작용하게 될까요? ‘운동장 상영’의 첫 발을 내디딘 올해는 적어도 절반의 성공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전주=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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