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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맞선녀가 물었다 "직영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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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맞선녀가 물었다 "직영이세요?"

입력
2015.05.0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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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장

전국 발로 뛰며 노동현실 반추

비정규직 노조로 껴안은 타타대우상용차 등

희망의 증거도 차곡차곡 채워

노동여지도 박점규 지음 알마ㆍ392쪽ㆍ1만6,800원
노동여지도 박점규 지음 알마ㆍ392쪽ㆍ1만6,800원

살랑바람에도 가슴이 뛸 20대 청년은 소개팅을 거절한 지 오래다. 맞선녀가 “직영이세요?”하고 정규직 여부를 확인한다는 동네 풍문을 숱하게 들었다. 정규직이 쓰다 버린 장갑을 골라 쓰는 치사쯤이야 눈 딱 감고 버텨줬다. 하지만 연애사업까지 하청의 비루함을 절감하고 싶진 않다. 같은 옷과 명함을 가졌어도 취업 형태에 따라 월급이 천지차이라는 울산의 얘기다.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이 전국을 발로 뛰며 노동현실을 반추했다. 삼성의 도시 수원, 소득 1등 노동자의 도시 울산, 떠돌이 박사들의 도시 대전 등 28군데 현장에서 1,800만 노동자들의 신산한 표정을 담아냈다.

그가 목도한 울산은 1인당 연소득 전국 1위를 자랑하지만 정확히 직영, 하청, 알바의 세 계급이 울분 속에 공존하는 도시다. 1987년 6월항쟁에 이은 노동자대투쟁에 앞장서고, 1996~1997년 민주노총 사업장의 100%가 총파업에 참가하며 ‘노동정치 1번지로’로 우뚝 선 울산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불어 닥친 정리해고 광풍 속에 비정규직들은 노동운동에서 조차 외면당했다.

기아차 광주공장에서 사내 하청노동자가 차에 시트를 넣고 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해도 정규직이냐 하청이냐에 따라 노동자들의 대우는 천지차이다. 노동자들은 소송을 냈고, 법원은 지난해 사내하청 노동자 468명에 대해 '모두 불법파견이며 기아차의 정규직'이라고 판결했다. 알마 제공
기아차 광주공장에서 사내 하청노동자가 차에 시트를 넣고 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해도 정규직이냐 하청이냐에 따라 노동자들의 대우는 천지차이다. 노동자들은 소송을 냈고, 법원은 지난해 사내하청 노동자 468명에 대해 '모두 불법파견이며 기아차의 정규직'이라고 판결했다. 알마 제공

“80년대 다 같이 ‘공돌이’였던 울산 노동자들은 이제 중대형 아파트에 살며 그랜저를 모는 직영계급, 소형 임대주택에서 아반떼를 타는 하청계급,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도는 알바계급으로 나뉘었다. 현대차 하청노동자로 들어가는 건 행운이고, 직영노동자가 되는 건 로또가 됐다.”

도처에 푸른 삼성의 깃발이 나부끼는 수원에서는 백혈병 등 직업병이나 자살 등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상처에 주목했다. 2007년 황유미씨는 삼성전자 기흥공장 입사 1년 8개월만에 백혈병으로 숨졌다. 2013년 10월에는 삼성전자서비스 엔지니어 최종범씨가 위장도급ㆍ불법파견과 그 부당성을 주장하며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돌을 앞둔 딸 아이를 남긴 채였다. 사무직은 어떨까. 평균 근속연수 9년, 임원 승진확률 0.1%란다. 저자는 황씨 아버지의 말을 빌려 묻는다. “삼성맨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이뿐이랴. 전주에서는 24년간 운전을 하고도 서울에서 같은 일을 하는 친구보다 월급도 작고 늘 해고 위협에 시달린다는 버스기사가, 광주에서는 19개 지하철 역 중 17군데 역을 가득 메운 비정규직 역무원들이, 여의도에서는 좋은 시절을 말로만 귀 따갑게 들은 증권맨들이 밥벌이의 지난함을 조용히 견뎌내고 있다.

존엄은 가고 모멸만 남은 척박한 국토 곳곳의 육성은 몸서리치도록 생생하다. 자주 책장을 덮고 먼 산을 보게 된다. 그런데도 “대기업이 장악하지 않은 도시가 없었고 재벌이 만든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를 빼면 쓸 이야기가 없었다”는 저자의 노정을 추동한 건 ‘재벌여지도’를 그리고 싶지는 않다는 절박함이다.

박 집행위원은 희망의 증거도 차곡차곡 채웠다. 군산 타타대우상용차는 2008년 비정규직 341명을 노조에 가입시킨 이후, 비정규직 해고 바람을 피해갔고 정규직 전환도 앞뒀다. 노동자들은 “성과급 대신 현장 후배들을 다 정규직 만든 것 아니냐”며 흐뭇해한다. 청주에서는 부도난 회사를 노조가 인수해 노동자 자주관리회사로 일군 우진교통이 일할 맛 나는 회사를 꿈꾸고 있다. 대표와 직원 월급이 같고, 조합원 선거로 뽑힌 자주관리위가 경영을 책임진다.

군산 전국금속노조 타타대우상용차지회는 2003년 노사교섭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합의했고 30~50명을 매년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전국금속노조 타타대우상용차지회 제공
군산 전국금속노조 타타대우상용차지회는 2003년 노사교섭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합의했고 30~50명을 매년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전국금속노조 타타대우상용차지회 제공

저자는 노동여지도를 위한 여정에서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이름을 되찾은 선배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면서도 ‘미생’의 장그래와 닮은 젊은이들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지도를 완성했다고 사과했다. 그는 이 책을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리지 못한 선배들의 반성문”으로 생각해달라고 했다.

물론 젊은이들이 마주한 골리앗이 정규직은 아닐 터. 공고한 재벌 구조, 10년 이상 왜곡돼 온 불평등 임금체계, 어떤 방식으로도 풀리지 않는 기업의 곳간, ‘일하기 좋은 나라’대신 ‘기업하기 좋은 나라’만 외치는 관료 등 지도 위에 덧그릴 지형은 수두룩하다. 우리 각자는 앞에 펼쳐진 이 적나라한 노동 영토 위에 어떤 그림을 보탤 것인가.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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