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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길 위의 이야기] 시간의 흐릿한 감광판

입력
2015.05.0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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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뒤지다가 오래된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90년대 초 유행했던,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이른바 맥가이버 헤어스타일. 배경은 잔설이 아스라이 남은 대학 캠퍼스. 그러나 내가 다녔던 대학은 아니다. 어디였을까. 기억을 잠깐 더듬어본다. 나는 연보라색 야상점퍼 안에 가로줄무늬 후드 티를 받쳐 입고 있다. 기억컨대 그 점퍼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줄곧 입고 다녔던 옷이다. 티셔츠는 과 축제 때 단체로 맞췄던 것일 게다. 다소 멋쩍게 웃고 있는데, 일순 그 무렵 소심하고 낯가림 심했던 내 성정이 떠올라 귀여워 보인다. 스스로가 귀엽다니. 이게 더 멋쩍은 일일지도.

옷차림이나 주변 풍광으로 보아 이른 봄 즈음일 듯싶다. 기억의 잠망경을 더 올려본다. 조금씩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정황들이 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꽃다발 따위가 단속적으로 아른거린다. 어머니와 누나, 고모도 있었던 것 같다. 셔터를 눌렀던 건 누구였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어쩐지 고모였을 것 같다. 그렇게 기억의 초점이 잡히자 장소가 돌연 명확해진다. 형의 대학졸업식 날. 그날 집안 어른 중 남자는 없었던 것 같다. 우르르 몰려가 오리구이를 먹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얼추 24년 전, 생의 한때가 그렇게 사라졌고, 나는 홀연히 그때를 돌이킨다. 무슨 백색 감광판 안에 들어온 기분. 삶은 그렇듯, 반투명하게 지속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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