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그제 미국 상ㆍ하원 합동연설 무대에 섰다. 예상대로 과거사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 여전히 모호하고 책임회피적인 발언으로 진실을 숨겼고, 오히려 전후 주변국들에게 일본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적반하장 의 궤변을 서슴지 않았다. 연설에서의 인식으로 볼 때 우리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의 지렛대로 삼고 있는 8ㆍ15 담화에서도 그의 전향적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아베 총리는 “우리는 전쟁에 대한 통절한 반성의 마음으로 전후를 시작했다”고 해 무라야마 담화의 핵심인 식민통치와 침략을 비껴갔다. 22일 반둥회의 때 했던 “깊은 반성”을 “통절한 반성”으로 바꾼 것이 고작이었으나 주변국에 대한 침탈이 아닌 2차대전을 반성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위안부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위안부 대신 “전쟁을 겪은 여성”이라고 하면서 “무력충돌은 항상 여성을 괴롭혀 왔다”고 했을 뿐이다. 앞서 하버드대 강연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인신매매의 피해자”라고 했던 것처럼 일본군의 책임은 언급하지 않고 남의 일처럼 치부했다. 두 차례 언급한 한국에 대해서는 “한국, 대만 등이 경제를 발전시킬 때 일본이 자본을 투입해 지원했다”며 일본을 은인으로 둔갑시켰다.
대신 그가 한 반성과 사죄는 거의 미국을 향한 것이었다. “2차대전 기념물을 참배하면서 전사한 미군 병사들의 잃어버린 꿈과 미래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묵념을 올렸다”고 애도했다. 미국인이 좋아하는 영화배우와 팝가수를 거론하고, 링컨의 애칭인 ‘에이브(Abe)’와 성이 같다며 환심을 사려할 때는 애처로움마저 느껴졌다.
문제는 우리 외교다. 과거사와 한국에 대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일본과, 이런 일본을 최고의 의전으로 환영하는 미국에 대한 전략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외교당국자에는 한국을 들러리로 세우는 미일유착을 돌파할 역량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아시아재균형 전략을 제시한 것이 2011년 11월이다. 2012년 말 ‘미국 우선’ 외교를 외치는 아베 정권이 들어섰고, 다음해 10월에는 도쿄에서 미일의 외교ㆍ국방 장관이 모여 일본의 집단적자위권을 공식 승인했다. 일본이 미국을 등에 업고 한반도에서 군사적 교두보를 치밀하게 구축하는 동안 우리는 과거사 프레임만 고집하며 시간을 허비했고, 뒤늦게 과거사와 안보를 분리하는 투 트랙으로 돌아섰지만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안보 공간은 사라진 뒤였다. 4년 전 미국의 새 전략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회성, 아전인수격 대응으로 일관했던 결과가 지금의 당혹스런 현실이다. 한국 외교의 틀을 다시 짜려면 먼저 외교 당국부터 대수술하는 것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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