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한국일보 4월 10일자)에서 보편복지 자체가 무상복지가 아니며 보편복지 확대를 원한다면 국민 스스로 더 많은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부담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마디로 복지는 공짜가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복지를 해야 할지, 그에 상응하는 부담을 어느 정도 국민이 받아들일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내지 대타협이 필요하다. 서구 복지국가들은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걸어왔으며, 그 결과 고부담-고복지의 노르딕 복지국가, 중부담-중복지의 유럽 대륙식 복지국가, 저부담-저복지의 미국식 자유주의 복지국가 모델 등이 나오게 되었다. 외국 예를 그대로 모방할 필요는 없지만 지난 몇 년 사이 우리도 어떤 방향의 복지를 선택해야 할지 사회적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치권을 중심으로 벌어진 복지 논쟁은 정당의 정치적 정체성과 정책 비전이 아니라 선거승리를 위한 정치공학적 계산이 주도하는 양상을 보였다. 해방 이후 당명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자유당과 한국민주당 체제에서 시작된 여야 정치구도는 보수여당과 보수야당의 대립이었을 뿐이다. 재분배와 복지 이슈가 보수 여ㆍ야당의 주요 정책의제가 될 공간은 협소했다. 지난 대선 때 보수집권 여당이 복지 이슈를 선점했다는 진단은 보수야당 입장에서 어차피 그 이상의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웠다는 설명도 된다. 진보의 핵심가치가 복지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당명을 바꾼 ‘정통 야당’ 민주당 전통에 기반한 핵심가치가 과연 복지인가? 한국 주류 정당정치에서 ‘보수 대 진보’ 대립구도가 존재한 적이 있는가? 새정치민주연합이 진보세력을 대표하는가? 경제정당 선언은 솔직한 자기고백이다.
이러한 야당이 예전에 지자체 선거에서 무상급식 의제로 선거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 후 무상보육은 감히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공동의 정책 의제가 되었다. 공공성이 실종된 보육서비스 전달체계가 영리추구의 장으로 변질된 상황에는 그 어느 쪽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내년 총선 때가 되면 양대 정당은 다시 한번 여론 동향을 살피면서 선별 혹은 보편복지 의제 선택 간 저울질을 할 것이다. 그런데 선별ㆍ보편복지는 서로 배타적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개념이다. 선별ㆍ보편복지 혼합이 서구 복지국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공통점이다.
국민을 그냥 먹여 살려주는 복지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득수준별로 국민은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부담한다. 그리고 사회적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이 이룩한 삶의 수준에서 급격히 추락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지원을 복지제도를 통해 제공받는다. 그러면 대다수는 일차노동시장에 머물면서 재기를 하게 된다. 물론 그 중 소수는 개인적이든 사회구조적 이유이든 노동시장 주변부로 밀려난다. 이들을 위한 최후의 사회안전망으로서 공공부조가 있다. 보편복지로서 사회보험을 통한 소득ㆍ의료보장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는 개인의 상황에 선별복지로서 공공부조가 개입한다. 사회 구성원 다수는 보편복지 영역에 머물고 나머지가 보편복지에서 선별복지 영역으로 이동하는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번 사회보험 영역에서 밀려난 상당수가 공공부조 영역으로 이동하지 못한 채 복지 사각지대에 머문다.
학교급식, 보육, 요양보호, 재활, 성장ㆍ발달 지원 등 사회서비스 영역에서 선별ㆍ보편복지 여부는 무상이냐 유상이냐가 아니라 해당 서비스를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필요할 때 받을 수 있느냐에 좌우된다. 사회서비스와 관련한 우리의 문제는 저소득층은 상대적으로 적은 본인 부담 혹은 무상으로 사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반면 중산층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선별이냐 보편이냐 하는 이분법적 구도가 사회보험과 공공부조 영역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답이 중산층 대상 무상 사회서비스 확대는 아니다. 사회보험 재정을 활용하여 보편복지로서 사회서비스 흐름을 구축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국민부담률을 높이면서 선별ㆍ보편복지의 이분법적 구도를 극복하는 시도를 시작할 때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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