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박물관ㆍ알링턴 국립묘지, 타국 전쟁 추모시설 생색용 방문
하버드대 강연서 日 책임 질문에 "위안부 구제 노력" 진실 회피만
미국방문 이틀째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7일 워싱턴시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박물관’을 찾고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헌화하는 등 ‘평화행보’에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하버드대학 강연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인신매매”표현을 고집하는 등 ‘위장된 평화홍보’란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베 총리는 줄곧 위안부 동원이나 식민지 지배, 침략 등 자국의 과거 잘못된 행위는 입에 올리지 않고 타국의 전쟁관련 추모시설을 잇따라 훑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일본인으로서 세계 평화에 공헌할 것”“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을 연발하지만 전범국가 지도자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진지한 메시지는 전혀 내놓지 않고 있다. 때문에 ‘과거사 물타기’행보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아베 총리는 이날 오후 워싱턴시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무명용사 묘에 헌화한 뒤 홀로코스트 박물관으로 이동해 45분간 머물렀다. 그는 이 자리에서 “비극을 풍화시키지 않도록 기억 속에 남겨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도(共同)통신은 이와 관련, 아베 총리가 전후 70년을 맞아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부전(不戰)의 결의’를 다졌으며 ‘역사 수정주의자’라는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의도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아베 총리는 2차대전 때 리투아니아에서 일본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씨로부터 비자를 발급받아 목숨을 건진 유대인 3명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스기하라씨는 유대인 난민 수천명에게 일본비자를 발급해줘 ‘일본의 쉰들러’로 불리는 인물이다. 아베 총리는 “이런 일본인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한국 기자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정문이나 후문이 아닌 외부 접근이 차단된 보안문으로 입장하면서 한국 언론의 질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오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열린 강연에선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인신매매에 희생돼 필설(筆舌)로 다하기 어려운 감정을 겪은 분들의 일을 생각하면 역대 총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하버드대 2학년 학생으로부터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수십 의 여성들을 성적 노예 상태로 강요하는데 직접 관련돼 있음을 당신은 부인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지만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직접적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대신 “고노(河野)담화에 관해서는 계승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몇 번인가 말씀 드렸지만 이런 입장에서 일본은 위안부의 현실적인 구제(救濟) 관점에서 노력을 쌓아왔다”는 말로 피해갔다. 마치 제3자가 논하듯 “마음이 아프다”라거나 “구제”란 표현으로 시혜적 관점만 드러낸 셈이다.
건물 밖에선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하버드대 학생 150여명이 ‘역사를 직시하라’‘역사는 다시 쓸 수 있어도 결코 진실은 다시 쓸 수 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아베 총리는 이런 불편한 장면을 외면이라도 하듯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들어갔다.
한편 아베 총리는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들에 거액 지원을 약속했다. 27일 매사추세츠공대(MIT)를 방문한 자리에서 일본현대정치 및 외교 관련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MIT와 컬럼비아대(뉴욕), 조지타운대(워싱턴)에 각각 500만달러(약 54억원)를 제공할 뜻을 표명했다. 역사인식 문제를 둘러싼 국제사회 비판이 커지는 가운데, 미국학계에 지일파를 늘려 우호여론을 확산시키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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