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호소할 방법 수화밖에 없지만
성폭력 전문 통역사는 전국에 1명뿐
경찰에 정확한 피해 알리기 어려워
피해자들 신고 꺼리고 상담 땐 배제
"공공기관·병원 등 전문 인력 태부족"
40대 중반 청각장애 여성 A씨는 몇 해 전부터 일주일에 두 세 차례 산부인과를 찾아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며 손짓, 발짓으로 고통을 토로했다. A씨가 병원을 갈 때면 서울 관악구 수화통역센터 소속 사회복지사들이 동행해 수화 통역을 해줬다. 지난해 9월 A씨가 세제로 온몸을 문지를 정도로 증세가 심각해지자 동행한 사회복지사들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센터에 도움을 청했다. 센터 내 청각장애인 전문 성폭력 상담사를 통해 드러난 A씨의 상처는 뿌리 깊었다. 10대 시절 옆집 남성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강박증세를 앓고 있었던 것. A씨는 그간 어디에도 피해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없었다. 고통을 호소할 길은 수화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손짓을 알아 들어 줄 상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A씨는 센터에서 4차례 심층 상담 후 상태가 호전돼 지난 1월부터 병원에 가지 않고 있다.
흔히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은 성범죄의 타깃이 되기 십상이다. 그 중에서도 A씨와 같은 청각장애 여성이 겪는 피해는 심각하다. 듣고 말하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탓에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수화 통역사의 입을 빌려 성폭력 사실을 신고해도 정확한 피해 정도를 알리는 과정은 다른 장애인보다 훨씬 지난하고 까다롭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청각장애 성폭력 피해자는 지레 신고나 상담을 꺼리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관악구 수화통역센터가 지난해 6월부터 이달 초까지 센터를 방문한 청각장애인 120여명을 상대로 ‘성폭력 상담 사업’을 진행한 결과, 13명이 과거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상담과 법적 도움을 구했다고 답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통계를 봐도 2013년 전국 장애인성폭력상담소 20곳에 상담 접수된 성폭력 피해 장애인 1,673명 중 청각장애인은 3.5%인 60명에 그쳤다. 정점희 관악구 수화통역센터 과장은 28일 “청각장애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애인을 위해 마련된 상담 공간에서조차 배제돼 이중고를 겪는다”고 설명했다.
성폭력상담소에 수화가 가능한 전문 인력이 없다는 점도 청각장애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음지에 머물게 하는 요인이다. 장애 여성의 인권 향상을 표방하며 2000년 출범한 장애인성폭력상담소에는 현장에서 피해 사실을 즉시 통역해 줄 수 있는 상담사가 한 명도 없다. 청각장애인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외부에서 수화 통역사를 수소문하는 까닭에 상담 시간은 최소 2,3배 이상 걸리기 마련이다. 현재 청각장애인 전문 성폭력 상담사는 전국 통틀어 관악구 수화통역센터에 소속된 직원 한 명이 전부다.
때문에 성폭력 전담 수화 인력을 확충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농아인협회에 따르면 현재 활동하는 국가공인 수화 통역사는 1,513명에 불과하다. 정부에 등록된 청각장애인 수가 28만여명인 점을 감안하면 통역사 한 명이 185명의 청각장애인을 책임지는 셈이다. 이미혜 한국농아인협회 사무총장은 “이 정도 규모로는 성폭력 상담은커녕 공공기관과 병원 등에서 기본적인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벅찬 실정”이라며 “수화는 청각장애인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인 만큼 전문 인력 확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민정기자 fac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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