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순박하고 어리숙할 뿐 아니라 얼굴도 못생겼다. 집까지 팔아 구해준 반금련에게 버림받고 급기야 독살까지 당하는 그야말로 졸장부였다. 반면 그의 동생 무송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아 천하에 용맹을 떨친 영웅이다. 훤칠한 키에 용모도 준수한 그를 반금련이 노골적으로 유혹하지만 그는 “형님을 배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형수를 달래고 나무라는 매너남이기도 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이런 ‘무대’와 같은 호칭의 별명으로 불린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도리어 김 대표는 수호지에서 그려지는 무대의 이미지와 정반대다. ‘무성 대장’의 줄임말인 무대는 ‘통 큰 형님’ 내지는 ‘선 굵은 정치인’ ‘작렬하는 카리마스’ 등의 의미로 읽힌다. 수호지에서 찾는다면 무대가 아닌 동생 무송의 캐릭터에 가깝다.
김 대표의 정치적 행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실제 호방한 무대를 만날 수 있다. 김용주 전남방직 회장의 차남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수하에서 정치 입문을 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무대의 호방한 정치 역정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에서 도드라지는데, 그는 2004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모시던 원박(원조 친박)이다. 그러다 2009년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박 대통령과 충돌하면서 ‘탈박(친박에서 이탈)’한 것은 또 다른 운명의 서곡이었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낙천자들의 탈당 저지에 총대를 멘 무대를 ‘복박(돌아온 친박)’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한나라당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그 해 대선을 승리의 길로 지휘한 그가 대선이 끝나자마자 “이제 내 역할이 끝났으니 좀 쉬어야겠다. 찾지 말아달라”는 메모 한 장 남기고 표표히 사라진 장면은 실로 극적이기까지 하다.
무대는 의리의 정치인이면서 감각도 뛰어나다. 뚝심도 있고 승부사 기질도 강하다. 2013년 재보선을 통해 여의도로 복귀한 뒤 지난해 7월 전당대회에서 친박의 대부라는 서청원 최고위원을 압도하고 당 대표를 거머쥔 그는 단번에 정치지형을 뒤집었다. 세월호 참사의 후폭풍 속에 여당의 참패가 예상되던 7ㆍ30재보선도 대표 취임 이후 보름 동안의 선거운동 끝에 압승으로 역전시켰다.
오늘 치러지는 재보선도 현재까지는 무대의 독무대 비슷하게 진행됐다. 전ㆍ현직 청와대 비서실장을 포함한 여권 실세 정치인들이 줄줄이 엮인 성완종 파문 와중에 문재인 대표가 지휘하는 새정치연합이 고전을 거듭하는 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다. 새누리당이 수도권 3곳을 석권하기라도 하면 2017년 대권을 향한 전초전에서 김 대표는 문 대표보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확실한 주자가 보이지 않는 여권의 후보군을 감안하면 김 대표의 대망은 보다 선명해질 수도 있다. 전패만 하지 않는다면 무대는 여전히 유력한 여권주자다.
그러나 무대가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우선 그가 의리와 뚝심, 승부사 근성으로 어려운 시기의 새누리당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온 것은 분명하지만 무대만의 리더십, 시대를 이끌어가는 분명한 목표를 보여준 적은 없다. 거구가 드리우는 그림자의 크기는 상당하지만 그 음영은 아직 옅고 위태롭다. 개헌론 공방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던 기억까지 감안하면 보수의 신뢰도 불안정하다.
무엇보다 대권을 향한 절박한 갈구가 흐릿하다. 대권은 통상의 정치적 리더십으로도 도전은 가능하지만 시대정신 내지는 역사적 소명 없이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산업화와 민주화 및 탈산업화로 이어지는 굴곡의 현대사 속에서 역대 대통령 누구 하나 시대를 대표하지 않은 이가 없다. 시대적 소명을 갖고 있더라도 시와 때가 받쳐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선까지 남은 2년 반은 분명 긴 시간이다. 무대에게도 비전을 갖추고 제시하기에 충분한 여유가 남았다. 시작은 현 정부와의 관계설정이 아닐까 한다. 박 대통령을 계승할지 뛰어넘을지, 변증법적으로 변환시킬지는 오롯이 무대의 몫이다. 정권은 거저 물려주거나 공으로 물려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김정곤 정치부장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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