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 제인 캠피언의 영화 ‘피아노’에는 인상 깊은 이미지가 등장한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놓여있는 피아노이다.
영화는 19세기 말 척박한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피아노와 어린 딸을 통해서만 소통하는 여주인공의 사랑을 다루는데, 남편이 피아노를 해변가에 버리고 여주인공이 원주민의 삶을 살던 남자를 만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안락한 실내나 공연장이 아니라 해변가에 놓인 피아노 한 대는 그 자체로 영화 속에서 강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느낌은 다르지만 이러한 피아노가 거리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그것만으로도 늘 봐오던 똑같은 공간과 무미건조한 일상이 새로워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2008년 영국의 설치미술가 루크 제럼은 빨래방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 간에도 서로 대화가 없는 것을 깨닫고 공공장소에 피아노를 설치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피아노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생겨날 것을 기대한 것이다. ‘Play Me! I’m Yours!’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영국 버밍엄 거리를 시작으로 50여 곳에서 진행됐다. 거리에 피아노가 놓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었다. 뉴욕의 ‘희망을 위한 노래(Sing for Hope)재단’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했다. 활동이 끝난 후 피아노들은 학교 등에 기증돼 지속적인 문화예술 활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2013년부터 ‘달려라 피아노’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 캠페인을 ‘문화가 있는 날’(29일)과 연계해 각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피아노를 기부 받아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작품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연주할 수 있도록 거리에 설치한다. 행사 후에 피아노는 지역의 공공장소 등에 기증한다.
4월은 그 첫 시작으로 29일부터 서울 서초구와 금천구에 피아노가 설치되어 일요일까지 운영될 예정이다. ‘문화가 있는 날’에는 가수 이한철과 홍찬미가 피아노와 함께 거리 공연을 선보인다. 깜짝 공연을 즐긴 시민들은 거리로 나온 피아노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건반을 눌러볼 수 있다. 놀랄만한 연주를 선보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력에 관계없이 피아노를 통해 서로 이야기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연출되길 바란다.
‘문화가 있는 날’은 시행 2년째를 맞아 문화시설의 문턱을 낮추는 것과 함께 국민들이 직접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날로 의미를 넓히려 한다. 지난 3월부터는 집에서 열리는 콘서트 ‘집콘’을 개최해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작은 공연을 열고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공공장소에 놓일 피아노들도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문화는 습관이다. 문화를 자주 접하다 보면 여유가 있어야만 문화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활동 자체가 삶의 여유를 찾는 충전의 기회임을 체득하게 된다. 평일에도 하루쯤은 문화를 즐기는 습관을 만들고자 하는 ‘문화가 있는 날’은 개인의 인식 변화와 함께 기업의 조기ㆍ정시 퇴근 문화 정착, 직원의 문화 향유에 대한 재정 지원 등 사회적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더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거리에 나타난 피아노를 본다면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던 옛 추억을 떠올리며 한번쯤 연주해 보기를 바란다.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든, 음계가 가물가물하든 상관없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즐거울 수 있다면 충분하다. 아니면 다른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해도 좋고 다른 사람의 연주를 즐겨도 좋다. 자연스럽게 함께 참여하는 그 자체만으로 더 없이 훌륭한 작은 콘서트가 될 것이다. 문화를 싣고 달리는 피아노를 통해 우리의 일상이 문화로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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