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대략 새벽 서너 시쯤, 거실 불을 끄고 냉장고 문을 열어둘 때가 있다. 음식 냄새와 섞인 주홍색 불빛이 거실 한편에 빗금처럼 떨어진다. 웅~ 하는 기계음마저 무슨 말소리 같다. 김치가 말하고 먹다 남긴 찌개냄비가 웅성거리고 일렬로 늘어선 갈색 달걀들이 발 맞춰 사열하는 느낌. 문득, 이 각양각색의 웅성거림을 오래 가둬두고 있다는 게 죄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나 답답하고, 각각의 다른 냄새들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웠을까. 그래서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듣는다. 물론 들리는 소리라곤 냉장고 모터소리뿐이다. 그럼에도 뭔가 자꾸 들린다는 느낌이 드는 건 실제 소리라기보다 거기에 투사된 마음의 분란 탓일 거다.
그것들을 맛깔 나게 조리해 냉장고에 담아놓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미움이나 슬픔은 빨갛고 네모난 통에, 기쁨이나 쾌락은 파랗고 동그란 통에, 고통과 번민은 맨 아래 칸에 생으로 담아 그게 외려 싱싱한 기쁨으로 변이케 한다면. 아니, 아예 고통과 기쁨을 같은 통에 담고, 미움과 사랑을 같은 칸에 넣어 서로 뒤엉켜 전혀 다른 식감의 새로운 음식이 되게 만들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누군가 쓸쓸하고 우울한 새벽, 불현듯 열어보고는 한데 섞인 그 냄새와 불빛에 스스로를 비춰보게 한다면.
고요한 시각, 냉장고 문을 연다. 쏟아져 나오는 빛과 냄새. 어떤 마음의 내장들 같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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