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서울극장은 한 때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통하던 곳입니다. 지금처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영화를 개봉하지 않던 1980~90년대 서울극장은 인근 대한극장, 단성사와 함께 극장 중의 극장 대우를 받았습니다. 영화인들은 영화 개봉 첫날 서울극장 매표소에 늘어선 줄을 보고 흥행 여부를 가늠했습니다. 서울극장 개봉작이라는 수식만으로도 비디오대여점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CJ CGV와 메가박스 등 대기업 계열 멀티플렉스체인이 도시 구석구석까지 들어서면서 서울극장의 위상은 급격히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최근 서울극장은 서울 유일의 민간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를 유치한데 이어 유명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의 입주도 확정하며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전체 11개관 중 2개관에 고전영화와 더불어 예술영화, 독립영화 등 이른바 ‘다양성영화’를 상영해 관객에게 ‘골라보는 재미’를 선사하겠다는 영업전략이 엿보입니다. 상업영화로 가득한 ‘동네극장’과 차별화해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보겠다는 것이지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대표적인 멀티플렉스체인 CJ CGV는 서울 도심 명동에 1일 다양성영화 전용관을 열어 서울극장의 행보에 맞불을 놓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CGV는 지하철4호선 명동역 바로 옆에 있는 CGV명동역점을 새롭게 단장해 CGV아트하우스 2개관을 엽니다. CGV아트하우스는 CGV의 다양성영화상영전용관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명동역점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19개관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CGV명동역점은 ‘씨네라이브러리’라는 별도의 공간도 마련해 다양성영화에 특화된 공간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합니다. 영화와 문학 음악 등 예술관련 도서 1만권을 비치합니다. 영화학도와 영화인들이 영화도 보고 책도 읽도록 해 창작의 산실로 만들고 싶다는 의중이 반영된 공간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올해 초 발간한 보고서 ‘2014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CGV는 지난해 기준 126개 극장, 948개 스크린을 운영 중입니다. 전국 스크린 수(2,098개)의 반 가까운 곳의 상영작을 결정하는 극장가의 큰손인 셈입니다. 국내 극장가를 쥐락펴락하고 충무로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CGV가 명동에 비주류 영역이라 할 다양성영화 전용관을 개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CGV는 충무로 지척에 위치한 명동의 지리적인 면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충무로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나 한국영화계에서 지닌 상징은 여전하기에 명동역점을 특화한 뒤 한국을 대표하는 멀티플렉스 이미지를 강화하겠다는 심사입니다. 영화학도와 영화인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면 한국의 대표 극장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기대가 숨겨져 있는 것이지요. CGV가 한국 극장가의 새로운 적통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속내가 엿보입니다.
경제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국내 다양성영화 시장은 최근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2014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다양성영화를 본 관객수는 1,428만3,284명으로 2013년(372만3,352명)보다 1,000만명 가량이 폭증했습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비긴 어게인’ 같은 대형 흥행작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으나 다양성영화의 시장 확대는 대세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입니다. CGV아트하우스가 CGV무비꼴라쥬에서 이름을 바꾸고 다양성영화 수입과 제작까지 뛰어들며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동인구가 많고 관광객들도 자주 찾을만한 명동역점에 CGV아트하우스가 없는 게 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요즘입니다. CGV 관계자는 “CGV아트하우스가 전국에 고루 퍼져 있으나 정작 서울 중심부에는 없다”며 “명동역점이라는 상징성만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말합니다.
출발점은 다르더라도 서울극장과 CGV아트하우스의 지향점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성영화를 디딤돌 삼아 서울 도심의 대표 극장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것이지요. 옛 영화를 재현하고 싶은 서울극장과 한국 극장가의 상징성까지 가지고 싶은 CGV의 치열한 관객 유치 전쟁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상업영화가 아닌 다양성영화가 도심 극장 대전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롭습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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