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서버를 거쳐 접속 당연시
이런 서버 클라이언트 구조는 감시·검열로 포위된 디지털 감옥
기업 네트워크에 의존할수록 인터넷 미래 그들 손에 맡기는 셈
비트코인의 이더리움 같은
탈중앙화된 인터넷 도전·실험 지속
인터넷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올해 초 다보스 경제 포럼에서 구글의 에릭 슈밋 회장은 “인터넷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의 인터넷은 공기나 중력처럼 우리 생활에서 흔하고 당연한 요소로 스며들어 매개자로서의 존재감이 사라질 거라는 전망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것을 영향력 아래 두는 절대적 권력의 존재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바깥의 인터넷이라고 할 수 있는 ‘이더리움(Ethereum)’은 지배 질서에 동화된 인터넷의 미래에 이의를 제기한다. 다른 인터넷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 만물상에 입고된 첫번째 해방의 도구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지금의 인터넷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에릭 슈밋의 말대로 인터넷 접속점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그 추세 또한 무섭게 가속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 첫 번째 인터넷 프로토콜이었던 IPv4의 경우는 약 43억개의 주소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1년에 주소를 모두 소진하고 할당이 중지됐다. 차세대 인터넷 주소 체계인 IPv6는 아이피 주소를 340조개나 부여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간 인터넷에 접속하리라 추정되는 2조개의 장치에 부여하고 넉넉히 남는 양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수십 년 내에 IPv6마저 바닥날 수 있다.
인터넷으로 유입되고 있는 데이터양도 전대미문의 기록을 쓰고 있다. 인류 문명의 시작에서 2003년까지 생산된 데이터의 총량은 5엑사바이트(1Exabyte는 10byte의 18제곱에 해당한다)라고 한다. 오늘날 5엑사바이트쯤은 전 세계 네트워크로 쏟아져 들어오는 이틀치 데이터 생산량밖에 되지 않는다. 2020년에 이르면 디지털 데이터의 생성 규모는 40제타바이트(Zettabyte)에 도달할 것이다. 전 세계 해변 모래알 수(7해50경개)의 57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트(bit)로 축조된 데이터베이스 환경에 세계 전체가 겹겹이 쌓이고 있다. 비트는 코딩 방식에 따라 상품이자 서비스이며, 무엇보다 돈으로 변할 수 있다. 가장 많은 비트를 수취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주인이 우리 시대 정치 경제 문화의 패권을 움켜쥘 수 있다. 더 많은 접속점, 더욱더 많은 데이터 생산량을 좇는 오늘날의 인터넷은 시장 경제의 가장 탐욕스러운 속성에 물들어 있다. 우리 시대는 어쩌다가 이런 괴물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일까?
에릭 슈밋은 이른바 구글노믹스의 장밋빛 미래를 ‘사라지는 인터넷’에서 찾았지만, 그의 전망은 인터넷의 지난 역사를 단순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인터넷은 수많은 이종(異種)의 인터넷과 더불어 발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사용자들의 직접적인 상호작용 능력에 기초한 기술이었다. 오늘날의 인터넷이 대기업 통신사에 획일적으로 집중된 서버 클라이언트(Server Client) 구조로 이뤄진 것과는 많이 달랐다. 게다가 지금의 정보자본주의와 인터넷은 금융시스템과 하나가 돼 있다. 내밀한 사생활에서부터 각종 사회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을 데이터베이스화 할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인간이다. 사실상 서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불과 30여년 사이에 벌어진 변화다.
거대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업의 서버를 통하지 않으면 접속할 수 없는 인터넷이 미래에도 계속되길 바라야 할까? 인터넷은 복수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서버 클라이언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기술이 시도되기 쉽지 않다. 통신사는 수익 구조를 침해받기 때문에 좌시하지 않을 테고, 국가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허점이 생기는 것을 내버려둘 리 없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해방적 역량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억압받아 왔는가를 알 수 있는 충격적인 사례가 있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에 의해 추진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인터넷 ‘프로젝트 사이버신(Project CyberSyn)’이 그것이다. 아옌데 정권은 칠레를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회주의 경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선 칠레의 현 경제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중앙 집중적인 관료주의를 피할 수 있는 분권적이며 민주적인 네트워크로 구축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1971년에 실제 가동됐던 사이버신 시스템이었다. 노동자들의 협동경영으로 운영되는 각 공장과 산업 단위가 이 네트워크에 연결됐다. 사이버신은 1973년까지 국가 경제 시스템의 75%에 접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칠레 기득권층은 남미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73년 9월 11일 미 중앙정보국(CIA)의 조직적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날 대통령궁에 가해진 폭격으로 아옌데는 사망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인터넷이 파괴된 날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인터넷은 이런 역사 위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발달했으나 진보하진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인터넷은 한마디로 가두리 양식장 신세다. 감시와 검열 기술로 포위된 서버에 갇혀 있다. 2014년 카카오톡 사태는 이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감청 논란에 휩싸인 카카오톡을 떠나 텔레그램으로 옮겨가는 현상은 집단적인 해프닝에 불과했다. 메신저 사용자들이 사생활 보호 기능이 강화된 텔레그램으로 옮겨간다고 해도 기본적인 인터넷 접속은 서버 클라이언트 구조를 거칠 수밖에 없다. 기업과 국가의 패킷 감청에서 구조적으로 벗어나기 힘든 환경이다. 지난 10년간 이 나라에서 인터넷 패킷 감청설비의 숫자는 무려 9배나 증가했다. 이 설비가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카카오톡의 보안성 문제 이상으로 심각한 사안이다. 최근엔 국내 병원의 진료기록 전산화 업무를 대행하는 한 민간회사가 미국 제약회사에 25억 건의 의료정보를 팔아먹은 일도 있었다. 서버를 둘러싼 우리 시대의 윤리는 이토록 저열하기 짝이 없다. 이런 환경을 내버려두고 사는 것은 단언컨대 굴종이다. 하지만 대중은 놀랍도록 이 비참함을 금세 잊어버린다. 가공할 무지와 무심함의 만연이야말로 우리 시대 인터넷의 참을 수 없는 경이로움이다.
지금의 인터넷이 당연한 상식처럼 여겨져선 안 된다. 에릭 슈밋의 말은 이렇게 비틀어야 한다. 인터넷은 이대로 사라져선 안 된다. 더 나은 인터넷에 대한 사회적 상상에 불을 지펴야 한다. 오늘날의 인터넷 네트워크는 폐쇄적이고 중앙 집중화되어 있다. 소비자들이 자신이 직접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인프라를 소유하지 않고 기업 네트워크에 의존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할수록, 인터넷의 미래는 소수 대기업의 독점적 운영에 좌지우지될 것이다.
다른 인터넷을 구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업화에 침범당하지 않는 정보 공유지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사회를 바꾸는 유일한 길은 다르게 생산하고 공유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 시대의 디지털 기술, 인터넷 기술에 억제된 부분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해방의 불꽃을 만드는 기술을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 뒤에 감추고 있다. 그것을 시민들의 공공재로 빼앗아 와야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5년 3월 15일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비트코인 진영의 새로운 인터넷 ‘이더리움’은 2010년대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손꼽힐 혁명적인 시도다. 이더리움은 서버를 경유하지 않는 인터넷이자 탈중앙화된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놀랍도록 젊고 참신하다. 그룹의 대표격인 비탈릭 부테린은 스무 살의 청년이다. 그 나이면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데 가장 영민할 수 있는 나이다. 대안적인 화폐 시스템과 인터넷을 연동시킨다는 이더리움의 개념은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었다. 중앙은행들의 국권 화폐가 흐르는 길이 서버 클라이언트 인터넷이라면, 이더리움은 탈중심화된 암호화폐(Cryptocurrency)가 흐르는 탈중심화된 인터넷을 지향한다. 이더리움에는 서버뿐만 아니라 대주주도 없다. 이더리움은 조직의 운영을 자동화하는 ‘분권화된 자동 기업(DAC)’ 시스템이다. 일반 기업과 달리 조직의 경영자가 전 세계에 철저히 분산되어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접속할수록 더욱더 다양하고 안정된 시스템이 구축된다.
이제 막 시작된 이더리움의 성공 여부를 미리 장담할 순 없다. 이더리움이 서버 클라이언트 인터넷의 지배질서를 전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더리움은 우리를 둘러싼 인터넷 환경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상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실험이다. 오픈 소스로 기술을 공개해 놨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종의 이더리움 개발에 뛰어들 수 있다. 이것은 비트코인 기술의 기본적인 원칙이기도 하다. 실패 뒤의 또 다른 실패, 실험이 끝난 뒤의 또 다른 실험으로 이어질 도전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그 창조적 연쇄를 멈추지 않고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보자본주의의 진행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꿀 역사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임태훈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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