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생활의 판타지 중 하나는 높은 책장이 가득 채워진 서재, 푹신한 안락의자에 발 뻗고 기대앉아 좋아하는 책들을 실컷 읽는 것이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볕과 차 한잔이 곁들여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생산활동에는 전혀 기여하지 않을, 순전한 쾌락과 허영으로 책을 소비하는 그 순간을 꿈꾼다.
26일 서울도서관에서 막을 내린 한국출판문화상 특별전시는 이처럼 즐거운 책 소비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이 도서전시는 1960년 한국일보가 제정해 55회째를 맞은 지난해 한국출판문화상의 수상작과 후보작들을 전시한 행사다. 장하성 교수의 ‘한국자본주의’(저술-학술부문)부터 그림책 ‘진짜 코 파는 이야기’(어린이청소년부문)까지 6종의 수상작과, 심사위원들이 예선에서 걸러낸 후보작 총 54종의 책들이 단정한 소개 패널과 함께 한쪽 벽에 자랑스레 얼굴을 내보이고 있다. 출판업계 관계자들은 “책이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다”는 반응을 보내왔다.
그렇다고 책을 우러러 박제화한 전시가 아니다. 전시장 한가운데 마련된 흰 단 위에 똑 같은 한 세트의 전시 책 54종이 날 잡아 잡수, 널브러져 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책을 펴들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자리를 제공한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꽂아야 할 ‘제 자리’는 없다. 어김없이 나이 어린 관람객들은 신발을 벗는다. 단에 올라 기대거나 엎드려 누워 책장 하나하나에 손때를 묻힌다. 엄마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아니면 각자 한 권씩 잡고 독서삼매에 빠진 부모와 아이의 풍경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아이고 어른이고 그림책, 도감, 지도책이 인기다. 두꺼운 책은 간혹 잠에 빠진 관람객의 베개도 된다. 이 또한 원래부터 책의 효용이다.
관람객 중에는 전시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일부러 찾아온 노인도 있고, 서울도서관을 찾았다가 배너를 보고 발을 들인 이들도 있다. 주말이면 엄마 아빠 아이가 동반한 관람객이 빠지지 않는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채 도심 시위에 참여했다가 잠시 지친 다리를 쉬어가는 이, 비를 피해 들어온 이들이 없을 수 없다. “훌륭한 도서전으로 소문이 났다”며 벤치마킹을 위해 들른 도서관, 학교 관계자들은 꼼꼼히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한다.
한국일보가 한국출판문화상을 처음 시상한 1960년 한국은 빈한했다. 출판규모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한 해에 출판된 책이 지금의 40분의 1 정도인 1,600여종에 불과했다. 한국출판문화상이 유일한 출판상으로서 55년 역사를 이어오는 사이 출판사가 사라지거나 절판하는 일이 무수했으나 본래의 사업 취지대로 우리나라의 출판문화는 크게 성장했고 양서를 생산했다.
우리는 책을 소중히 하는 사회가 풍성해짐을 안다.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그랬고, 중세 이탈리아 베네치아가 그랬다. 책에 쓰인 것이 늘 옳기 때문이 아니라, 각기 다른 수준의 지식과 주장과 취향이 어느 책인가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나면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 읽어야 할 책 목록이 펼쳐진다. 그런 식으로 사람은, 인류는 지금에 다다랐다. 인류 공동의 지식과 표현의 저장소에서 자유롭게 헤매던 이들이 나중에 또 한 권의 목록을 추가하게 마련이다.
한국출판문화상 특별전시는 이제 전국의 도서관과 서점들이 주최하는 산발적인 연계전시로 이어진다. 영풍문고 전국 8개 매장과 서울 중랑구립정보도서관에서 이달에, 5월에는 수원 선경도서관과 인천 미추홀도서관에서 전시를 이어받는다. 9월까지 23곳에서 연계전시가 이어질 예정이다.
그림만 구경하거나 잠 자며 쉬어가는 시간이 되더라도 책 사이에서 버리는 시간은 아깝지 않다. 책들 틈바구니에서 시간을 죽이던 열 명 중 한 명은 어쩌면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위해, 또는 자극받은 호기심을 다른 책으로 풀기 위해 서점으로 발길을 돌리게 마련이다. 책과 사랑에 빠진 이들 중 한 명쯤은 그 자신이 책을 쓰는 저자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다 수만, 수백만명에게 영감을 줄 훌륭한 책의 저자가 그 안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봄에 어떤 방식으로든 책을 만나도 좋은 이유가 아닐까.
김희원 문화부장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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