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묵적 동의란 게 있다. 혼란을 겪고 싶지 않은 ‘어른’들의 행동 양식이다. 불합리한 세상을 알게 됐지만 어쩔 수 없으니 일단 넘어가자는 정서다. 마흔 셋의 박진영이 여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할 말이 많았다. JYP엔터테인먼트라는 큰 연예기획사를 거느리고 있는 오너치곤 제법 수위가 높았다. 그렇다고 박진영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난 나쁜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주문을 거는 정도다. 서울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진영은 그렇게 몸과 마음이 더 늙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진영의 1위는 거의 8년 만이다. 미쓰에이를 ‘팀킬’했다고 할 정도로 JYP엔터테인먼트의 전성시대다.
“결과가 좋았을 뿐 순위엔 관심 없다. 내게 중요한 건 ‘얼마나 잘 살았는가’다. 결과 위주로 조명 받고, 판단하는 것 같아서 아쉽다. 그렇다고 결과가 굉장히 공정한 집계에 의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음악 프로그램 순위를 봐도 납득하기 쉽지 않고, 사재기란 것도 있을 수 있다. 결과가 어찌됐든 과정에 관심을 가져줄 때 발전하는 것 같다.”
-차트 순위에 대한 깊은 불신이 묻어난다.
“우리나라는 사실 어느 분야든 이 부분이 잘 안 된다. 야구를 예로 들면 메이저리그엔 명예의 전당이 있다. 음악은 빌보드나 오리콘, 그래미 등에서 각종 기록과 시상을 한다. 그러나 우린 방송사 연기대상 하나도 통합이 안 된다. 각자의 셈이 틀리다. 가요 시상식? 뭐가 공정할까 고민하는 사람이 없다. 힘있는 사람끼리 친하게 지내면서 점점 신생으로 하는 사람은 절망감만 안겨준다.”
-‘힘있는 사람’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힘있는 사람들의 유형은 두 가지다. 게임이 자신한테 유리하도록 만들던가, 비합리적인 부분을 공평하게 바꾸려는 사람이다. 너무 아쉬운 건 전자의 경우가 많다. 나도 변할까 두렵다. 하지만 내가 더 힘을 갖게 되면 그 어떤 평가나 기록이든 좋은 신인들이 절망감을 안 느끼게 하고 싶다.”
-바꿔보려고 한 일은 없나.
“사실 가요계도 장벽이 무척 두껍다. 신생 기획사에서 신인 가수 한 명을 데리고 시작한다면 너무 힘든 구조다. 그 게임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바꿔보려고 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메일도 써보고, 만나서 얘기도 해봤지만 하나도 안 먹히더라. 기록과 평가, 게임의 룰, 그 게 공정해야 한다. 어른들이 꼭 나쁜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 부지런하게 사는 어른도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다. 몇 년 간 싸워봤는데 아무도 말을 안 들어줬지만….”
-그동안 겪었을 순위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진다.
“결과만 보면 공황장애 걸린다. 실시간 5분 단위로 뒤바뀌는 순위를 어떻게 계속 매달릴 수 있나. 24시간 내내 이러니 주식보다 더하다. 회사 경영도 얼마나 올바른 과정이었나 점검하고 결과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과정을 강조해도 직원들이나 가수들 역시 전부 결과 얘기만 한다.”
-어떤 과정을 봐줬으면 좋겠나.
“JYP엔터테인먼트는 탈법, 편법, 탈세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접대문화로부터 우리의 가치관을 지키려고 한다. 정말 재능이 뛰어나도 그러한 가치관을 어기면 가차없이 내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저런 능력자를 내쳤나’라는 식으로 보기만 한다.”
-소속 가수의 음악 작업에서 조금씩 손을 떼는 것은 어떤 과정인가
“스티브 잡스가 죽고 애플의 주가가 반토막 나는 것을 보며 JYP엔터테인먼트의 미래를 다시 그렸다. 회사가 1명의 카리스마로 운영돼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 때부터 내가 곡을 덜 쓰고, 많은 것을 놓기로 결정했다.”
-그러는 사이 ‘빅3’기획사라는 개념에서 많이 밀려났다.
“지금 ‘빅3’냐, ‘빅100’이냐는 의미없다. 소니를 보면 알 수 있다. 원톱이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의미 없지 않나. 짧은 것에 욕심을 부리면 반칙이 생긴다. 목적을 길게 두고 가면 순간순간 그렇게 할 일이 없다.”
-지난 1월 설립한 레이블인 스튜디오J가 방금 말한 ‘길게 둔 목적’으로 보면 되나.
“레이블은 뮤지션 중심의 독립체로 꾸려갈 것이지만 점차 늘려갈 생각이다. 다른 선배들 기획사 보니 시가총액 1조원이 어떠한 벽처럼 보인다. 그 걸 깨고 싶다. 미국 대형 음반사의 구조와 시스템을 많이 공부했다. 세계적인 음반사 유니버셜과 같이 20여개의 레이블을 품는 것이 목표다. 모든 성과가 나오는 시기는 2020년에 맞춰놨다.”
-해외 시장 공략 없이 불가능한 목표다. 하지만 K팝이 현재 한계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는데.
“매우 큰 프로젝트를 몇 년 간 준비했다. 올해 하반기부터 중·일 프로젝트 베일을 벗을 것이다. 한국 가수를 중국에 수출하는 건 아니다. 지금 말할 수 없지만 기대해도 좋다.”
-회사 경영, 가수 활동, 음악 프로듀싱 등 몸이 열개라도 모자르겠다. 박진영으로 사는 기분이 어떤가.
“정말 감사하다. 정확한 신앙은 없지만 하늘에 대고 하루에 열 번 고맙다고 말한다. 감사해서 불안하다. 몸도 건강하고, 받은 복이 많아서 어떻게 갚을지 항상 연구한다. 가수로선 60세 때 춤을 제일 잘 추겠다는 목표가 있다. 2032년 1월 13일이 그 날이다. 철저하게, 힘들게 관리하면서 ‘너도 참 힘들게 살았구나’라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 또 CEO(최고 경영자)가 아닌 CCO(창의성 총괄 책임자)가 되어 항상 재밌게 그리고 뚝심있게 JYP엔터테인먼트를 이끌고 싶다.”
심재걸 기자 shim@sporbiz.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