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계속 머리 속을 맴도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긴 소매 상복에 건(巾)을 뒤집어 쓴 채 고개를 숙이고 비스듬히 잡은 지팡이에 의지해 걷고 있는 한 사람. 담묵(淡墨)으로 막힘 없이 그려졌지만 인물의 필치는 뭔지 모를 깔깔한 쓸쓸함이 배어 있다. 그림 상단에 거칠게 흘려 쓴 제화시(題畵詩)의 내용도 그렇다.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만드는데(將無能作有) 그림으로 모습을 그릴지언정 어찌 무슨 말을 전하랴(畵貌豈傳言) 세상에는 시인이 많고 많지만(世上多騷客) 누가 이미 흩어진 나의 혼을 불러 주리오(誰招已散魂).’
이것은 연담(蓮潭) 혹은 취옹(醉翁), 주광(酒狂)이라 불렸다는 17세기 조선의 화가 김명국이 그린 죽음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더 널리 알려진 그림의 제목은 은사도(隱士圖)지만 연세대 철학과 이광호 교수가 화제(畵題)를 분석하면서 속세를 떠나 은거하는 선비의 모습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화가 자신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고 ‘화인열전’(유홍준 지음ㆍ2001년)에 수록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6세기경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9년간의 면벽좌선으로 선종(禪宗)의 개조(開祖)가 되었다는 보리달마가 두포(頭布)를 쓰고 있는 상반신만을 그린 달마도는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다. 단숨에 그어 내린 듯 대담하게 생략된 감필(減筆)을 써서 활기와 고통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모습으로 표현된 달마도와 죽음의 자화상은 비슷한 듯 다르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또 술에 취하면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욕취미취지간(慾醉未醉之間), 즉 취하고는 싶으나 아직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필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그림을 그리는 동료들과는 농담 삼아 정신줄을 반만 잡고 그려야 좋은 그림이 되더라는 경험을 말하곤 했는데 김명국에게는 술이 자신을 비우고 넘어서서 호흡지간의 생사 경계를 오가게 한 촉매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4월 내게 주어졌던 지면들을 돌아보니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죽음과 애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말할 수 없이 마음이 힘들었다. 시에 대해 쓸 때에도 전시에 대해 쓰거나 책에 대해서 쓸 때에도 그것은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도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에 결국 무엇 하나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서 올해 4월, 그리고 다시 4월 16일이 왔고, 모든 것들은 놀랄 만큼 미결의 상태이지만 세월호 1주기의 추모행사가 있었던 당일은 충격과 함께 그에 맞서는 경이로운 소식들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광장 안과 밖의 많은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여전히 빛나는 애도의 의지를 보았다.
나의 가족에게 4월은 동생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는 소소한 기억들을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이 믿기 어려운 집단적인 죽음 앞에서는 김명국의 화제처럼 어떻게 무슨 말을 전할 수 있겠는가. 흩어진 영혼들이 처연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애도하고 함께 불러줄 뿐이다.
급작스레 맞닥뜨린 이별의 시간에는 내게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고 오로지 나 또한 때가 되면 그 길에 합류할 수 있다는 명징한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때가 되지 않았던 이 처참한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생각하면 애통하고 비통하기만 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에게 줄 것이 국가의 재난을 방조한 책임자들의 부재와 끝없는 경찰차의 벽과 물대포와 연행 밖에는 없는 것일까. 왜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는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애도가 아니라 죽은 자들의 말, 그들을 잃고 남겨진 자들의 말, 그리고 미처 발화되지 못하는 그 사이 숱하게 존재하는 말 없는 말을 듣는 것이 애도이다.
이정민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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