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개항한 日대표 환승공항
비싼 공항이용료 탓에 쇠락의 길
저가항공 전용터미널 개장
공항서 밤새는 여행객 위해
누울 수 있는 소파 100석 마련
항공사 사용료 반값 등 저비용 승부수
일본 나리타(成田)공항이 지난 8일 저가항공사(LCCㆍLow Cost Carrier) 전용 ‘제3여객터미널’을 열고 재기의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 동안 일본의 ‘간판 공항’이면서도 인천공항이나 도쿄 도심과 가까운 하네다(羽田)공항에 밀려 쇠락의 길을 면치 못하다, 생존을 위한 승부수를 꺼내든 것이다. 나리타공항이 새 터미널을 개업한 것은 1992년 12월 제2터미널 개장 이후 22년만이다. 한국 제주항공과 호주 제트스타 등 해외항공 2개사와 제트스타재팬, 일본춘추항공(Spring Japan), 바닐라에어 등 국내선 3개 등 5개의 저가항공사가 운행을 시작했다. 국제선은 대만 홍콩 한국 호주 등 7개 도시, 국내선은 삿포로(札幌) 간사이(關西) 시코쿠(四國) 큐슈(九州) 오키나와(沖繩) 등 12개 지역을 연결, 연간 550만명을 운송할 계획이다.
일본정부는 나리타공항과 하네다공항의 국제선 취항도시를 2020년까지 한국의 인천ㆍ김포공항을 합한 수준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저가항공 전용터미널 개설은 이런 ‘그랜드 플랜’의 연장선이어서 향후 동북아 허브공항 구도 재편을 노리는 한일경쟁 또한 치열해질 전망이다.
2020년 도쿄올림픽 겨냥한 디자인
지난 19일 오후 도쿄역에서 ‘JR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한 시간여 만에 도착한 나리타공항 제3터미널은 막 새 단장을 마쳐 마쯔리(일본의 지역축제) 현장을 연상케 할 만큼 활기가 돌았다. 특히 눈에 띈 건 육상트랙처럼 선을 그어 꾸민 바닥이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겨냥한 디자인임을 알 수 있다. 파란색과 갈색으로 방향을 구분해 여행객에게 청량감을 주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달리기를 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소재는 실제 육상 트랙에 사용되는 푹신한 고무 칩. 설치작업도 육상경기장 건설회사가 맡았다고 한다.
제3터미널의 공간디자인을 담당한 이토 나오키(伊藤直樹)씨는 “사람에게 여행이란 매우 특별하다, 문뜩 생각난 게 육상트랙 소재였다”며 “푸른 트랙은 앞으로 먼 나라로 떠나는 사람에게 여행의 들뜬 기분을 표현하며, 땅의 색깔인 갈색은 긴 여행을 끝내고 일본에 도착한 안도감을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면세점 매장은 주변을 온통 흰 벽면으로 통일해 깔끔하게 연출했다. 책이나 여행용품,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는 상점과 환전 카운터가 들어섰다. ‘도쿄 바나나’등 일본 과자를 구입하는 외국인들이 몰려있다. 이슬람교도 등 외국인을 위한 기도실도 설치돼 있다. 대형 푸드 코트로 눈을 돌리면 초밥 및 우동, 돈까스, 햄버거 등 점포들이 줄줄이 입주해 450여 좌석이 여행객들로 만원이다.
밤새는 여행객 위해 큼지막한 소파 배치
24시간 개방하지 않는 기존 나리타 공항의 단점을 해결한 게 큰 성과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저가항공 승객들의 특성상 주변엔 큼지막한 벤치들이 배치됐다. 공항에서 밤을 지내는 여행객들이 누울 수 있도록 소파 100석 이상이 마련된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가구ㆍ생활용품 브랜드인 무지루시료힌(無印良品)이 제작을 전담했다. 대만을 다녀왔다는 회사원 와타나베 리키(28)씨는 “소파가 편해 반나절 공항에서 대기하거나 이른 아침 출발할 때 굳이 호텔에 묵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만족해 했다. 또 제3터미널은 공항 본관과 15m 높이의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다. 왕래하는 항공기를 바라볼 수 있어 기념촬영 장소로도 이용된다.
이렇게 꾸며진 제3터미널은 3층짜리 본관을 비롯해 연면적 6만6,000㎡ 규모지만 건설비용이 다른 터미널보다 40% 가량 저렴한 150억엔(1,365억원)이 소요됐다. 줄일 수 있는 건 다 줄여서 값싼 비용으로 승부하겠다는 취지다. 이 때문에 눈을 위로 돌리면 천장엔 온갖 철골 구조물과 배관선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비용절감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35세 회사원이라는 남성은 “천장만 보면 공항이란 느낌보다 거대한 쇼핑몰 같다”며 “저가항공 터미널이니 건설비도 아끼려 한 것 같아 이해가 간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에어컨 비용도 아끼기 위해 창문을 거의 만들지 않아 열을 놓치지 않는 구조다.
적은 비용으로 마무리 짓다 보니 불만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가장 가까운 공항 제2터미널역이나 주차장에서 건물 입구까지 500m 이상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 15분이 넘게 걸린다. 도쿄 우에노 지역에 산다는 54세 여성은 온몸으로 여행가방 3개를 끌고 가면서 “걷는 거리가 길어 몸이 불편하거나 짐이 많은 여행객들은 힘이 든다”며 “보행용 에스컬레이터가 갖춰지지 않아 보통의 공항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네다 공항에 뒤쳐진 과거 청산하나
당초 나리타공항이 1978년 개항한 후 일본에선 ‘국내선은 하네다, 국제선은 나리타’란 역할분담이 유지됐다. 나리타공항은 아시아와 북미를 잇는 대표적인 환승공항이었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비싼 공항이용료 등으로 이용객이 줄면서 환승 수요가 크게 줄었다. 그러던 게 2009년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국토교통장관의 ‘하네다 허브공항 구상’이 나오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나리타공항이 있는 지바(千葉)현과 간사이(關西)공항이 있는 오사카(大阪)부가 거세게 반발했지만 정부의 선택은 이용객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나리타공항이 도쿄 도심부에서 60㎞나 떨어진 지바현 나리타(成田)시에 있다는 지리적 약점이 결정적이다. 모노레일을 30분만 타면 도쿄 도심에 닿는 라이벌 하네다공항과의 경쟁은 역부족이었다. 나리타공항에서 만난 40대 한국인은 “나는 고향인 부산행 비행기가 나리타공항에 있어서 이곳을 이용하지만 서울로 가는 친구들은 20만원 정도의 가격차를 감수하고 접근성이 뛰어난 하네다공항을 선호한다”고 전했다.
벼랑 끝에 몰린 나리타 공항은 항공여행을 저렴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요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전세계적으로 붐을 이루고 있는 저가항공의 급성장에 눈길을 돌린 것이다. 저가항공 전용터미널로 방향을 잡은 뒤 건축비를 억제시킬 방법을 강구했다. 저비용을 앞세워 항공사 유치전략에 나선 것이다. 제3터미널은 항공사 사용료가 제1ㆍ2터미널의 절반 정도이며 이용객에게 받는 국제선 시설사용료와 안보서비스요금도 제1ㆍ2터미널보다 1,000엔이 싼 1,540엔 수준이다.
목표는 아시아 허브공항, 인천 추월
나리타국제공항회사 나쓰메 마코토(夏目誠) 사장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한국의 인천공항에 뒤지는 근거리국제선 유치를 위해 착륙료를 무료화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인천공항을 경쟁대상으로 거명했다. 신규항공사가 나리타공항에 노선이 없는 직항노선을 신설할 경우 1년간 착륙료를 면제해주고, 2년 차에 25% 할인율을 적용하는 게 골자다. 또 하와이나 상하이 등 이미 직항편이 있는 노선도 신규로 취항한 항공사에 대해서는 착륙료를 20% 깎아주기로 했다. 이에 따른 수익감소가 연간 10억엔으로 추산됐지만 이를 감수하고서라도 허브공항 도약을 위해 도전에 나선 것이다.
나리타공항의 승부수가 통할지 아직은 미지수다. 가장 큰 한계는 24시간 발착이 가능한 하네다공항이나 오사카(大阪) 간사이(?西)공항과 달리 원칙적으로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좀더 운영시간을 늘릴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소음문제 등 나리타 지역주민들과의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인천공항은 전세계 143개 도시에 취항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나리타와 하네다공항을 모두 합해 아직 88개 도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천공항이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 4년만의 환승객 감소로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인천국제공항 환승객은 725만명으로 전년보다 46만명 줄었다. 환승률도 16% 수준으로 전년보다 2% 포인트 줄었다. 나리타 제3터미널 관계자는 “한국의 대형공항에는 저가항공 전용터미널이 없다”며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수요는 더 커질 것이다. 제3터미널 설계 용량인 연간 여객수 750만명을 조기 달성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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