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편집국에서] 헐한 땅, 헐한 꿈

입력
2015.04.21 18:27
0 0

전남 신안의 한 섬에 친구가 산다. 대학 나와 취직 않고 낙향한 지 올해로 꼭 10년. 후미진 바닷가 무허가 민박집에서 혼자 지내며, 여름 한철 민박 손님 보고 아이스크림을 사 쟀다가 태풍에 전봇대가 쓰러지는 바람에 수삼일 혼자서 녹은 하드만 먹고 지낸 적도 있고, 지하수 양수기가 고장 나 남의 밭 스프링쿨러를 따라 돌며 몸을 씻은 적도 있다는 친구다.

처음엔 무슨 재무관련 자격증을 딴답시고 외국 책 사들이고 외국 신문도 구독했지만 비가오나 눈이오나 매일 그 오지까지 신문 배달을 해야 했던 우편배달부의 원한만 산 채 일찌감치 포기했다. 농번기엔 집 농사 돕고 임시 교사도 하더니 지금은 월 100만 원 남짓 받는 계약직 마을 발전위원회 사무장이다.

그가 얼마 전 대지주가 됐다. 평당 1,000원도 안 되는 가격에 작은 무인도의 약 절반인 1만여 평을 산 거다. 어선이라도 빌려 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수십 년 전까진 마을이 있었고 지금도 땅 파면 지하수가 솟는 멀쩡한 섬이라고, 땅값이 그러니 주인들도 잊다시피 한 곳이어서 섬 전체가 자기 거나 다름 없다고 그는 자랑했다.

더 들뜬 건 도시 친구들이다. 한 친구는 제대로 된 ‘부시 크래프트(bushcraft, 원시 생존기술로 자연을 누리는 신종 여가활동)’ 체험장으로 쓰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또 한 친구는 섬 전체를 자급자족 예술학교로 꾸며 매년 꽃 필 때 졸업 전시회 겸 예술 축제를 열자고 했다. 그들은 지금 헐한 땅이 허락한 헐한 자유, 헐한 꿈을 꾸고 있다.

지난 4월 1일은 우주피스(Uzupis)공화국 독립 기념일이었다. 우주피스는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 외곽의 작은 예술인마을. 1997년 그날 마을 주민들이 만우절 농담처럼 독립을 선포한 이래 매년 만우절마다 장처럼 서고 지는 공화국이 됐다. 하루살이 공화국이지만 헌법도 있고 대통령도 있고, 장정 12명의 상비군도 있다.

원래는 수세기 유대인 마을이었고, 게토였다. 대전 중 주민 다수가 학살 당했고, 소비에트 해체와 리투아니아 독립 후 빈 마을은 마약과 매매춘의 소굴이 됐다. 그 마을을 살려낸 건 90년대 들면서 하나 둘 스며든 동구의 가난한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깃들인 빈 집을 치워 연극을 하고, 문패 대신 그림을 내걸고, 음악회로 모이고 춤판을 벌였다.

우주피스 독립 선언은 그러니까 만우절 장난만은 아니었다. 당장은 시 당국에 대한 마을 공유지 점유권 주장, 이를테면 ‘권리금’ 보장 요구였다. 38개항 공화국 헌법 제1조는 “모든 국민은 빌넬레(Vilnele) 강변에 살 권리가 있고, 빌넬레 강은 국민 곁을 흐를 권리를 지닌다”다. 동시에 정체성 선언이었다. 그들은 일체의 상업 시설을 들이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자본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했다. 우주피스는 국민의 빈둥거릴 권리(제9조)를 헌법으로 보장한 최초의, 아직은 유일한 국가다.

하지만 위태로운 국가다. 국가란 게 어차피 정의나 덕이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하는 기구이고, 민주주의란 것도 근본적으론 인간 불신에 기반한 이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그 인간의 이기심이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되게 고안된 시스템이다. 장정 12명으로는 불가항력인 상시적 위협들이다.

한 중견 탤런트와 유명 가수가 서울에서 가장 신진대사가 빠르다는, 용산구에 각각 건물을 각각 사들여 세입자 퇴거를 요구했다고 한다. 영세업자들은 오래 터 닦은 지역을 떠나게 됐고,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해왔다는 한 카페 역시 곤란한 처지에 몰린 모양이다. 상가 권리금을 보호해줄 법이 없으니 호소할 데라곤 선의 밖에 없다. 하지만 선의란 믿음직한 버팀목이 아니고, 법의 부실함이 사적 선의를 요구할 근거일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안다. 그리고 법은 늘, 있다 한들 최소한의 선을 지향하는 법이다.

내 것도 아니고 가본 적도 없는 먼 바다 무인도 꿈을 더 자주 꾸게 된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