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히드 사건으로 우뚝 선 일본의 검찰
성완종 리스트 수사여건 훨씬 더 나아
뚜렷한 결과로 국민 자괴감 풀어 주길
‘아이 엠 쏘리(I’m Sorry)’라는 컴퓨터게임을 새삼 기억한다.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 당시 유행했던 ‘벽돌 깨기’나 ‘갤러그’ 수준이었다. 주인공이 미로와 같은 길을 돌아다니며 금괴를 훔쳐서 집에 쌓는 게임이다. 통나무 같은 장애물이 나타나면 피하거나 뛰어넘어야 하고, 철문이 가로막으면 주먹으로 쳐부수고 나가야 한다. 훔치는 금괴의 양에 따라 점수가 높아지고, 주인공의 집은 점점 더 화려해 진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게임은 일제(日製)였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까지 유행이 번졌다. 게임의 원래 제목은 ‘나는 총리다(私は總理)’였으나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과정에서 총리의 일본 발음이 ‘쏘리(そうリ)’인 까닭에 ‘아이 엠 쏘리’로 바뀌었다고 했다. 당시 일본을 뒤집어 놓았던 ‘록히드 뇌물수수 사건’을 패러디 한 것이었다니, 일본 국민의 자괴와 분노를 짐작할 만하다. 일본 국민 전체가 국제사회를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던 셈이다.
1976년 미국에서 록히드 항공사가 많은 국가의 유력한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독일과 네덜란드 등 유럽국가 인사들도 포함돼 있었으나 일본에서 유난히 큰 사건으로 비화한 것은 뇌물을 받은 사람이 당대 최고의 권력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英)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사건이 폭로되었을 때 일본 총리는 미키 다케오(三木武夫)였지만, 일본정치의 특성 때문에 당시 국민들이 느끼는 실질적 최고 권력자는 다나카 전 총리였다. 다나카 전 총리는 구속됐다.
우리 표현으로 ‘현직 왕(王)총리’를 구속한 일본 검찰은 이후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직하게 본분을 다하는 검찰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당시 검찰총장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한 마디의 말로써 검찰조직의 방패막이가 돼 주었고, 수사팀장 검사장은 “수사가 난관에 부딪힌다는 이유로 망설인다면 앞으로 20년 동안 우리 검찰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사건이 검찰의 손을 떠난 뒤 정치적 마무리가 흐지부지 됐던 것은 일본의 정치구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구속된 지 한달 만에 보석금을 내고 출소했으며 이후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재판은 지지부진했고 판결은 미뤄졌다. 1993년 12월 그가 사망한 이후 상고심이 재개됐고, 14개월 뒤인 95년 2월에야 사망한 사람에게 수뢰혐의를 최종 인정했다. 하지만 ‘다나카-록히드 사건’은 법과 원칙을 지킨 일본 검찰의 위상과 ‘아이 엠 쏘리’라는 일본 국민의 각성과 사과를 전 세계에 남겼다.
당시 일본 검찰이 ‘왕총리’를 잡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은 두 가지 정도로 알려져 있다. 우선 들끓었던 민심이었다. 국민 모두가 ‘국제적으로 창피하여 고개를 들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나는 총리다’ 패러디가 일본 열도를 휘저었던 이유다. 다른 하나는 당시 같은 당 소속의 미키 총리가 수뢰사건 수사를 완전히 방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건의 모든 증거와 증언들이 미국에 있었고, 길거리에서 승용차끼리 접촉해 돈을 주고받았다는 정황 정도가 애초 드러난 단서였다. 검찰로서는 ‘수사가 난관에 부딪혀 망설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앞으로 20년 동안 잃게 될 국민의 신뢰’를 염려했기에 최고 권력에 대한 수사의 끈을 다잡아 갔다.
30여년 전 ‘다나카-록히드 사건’을 다시 들춰본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너무나 뚜렷한 데자뷰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민들의 마음은 ‘창피해 죽겠다’는 자괴감을 넘어 ‘미워 죽겠다’는 증오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같은 당에서도 수사 방치(?)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협력도 아끼지 않을 태세다. 수사 대상도 일본 ‘왕총리’에 비하면 덜 껄끄럽고, 증거나 증언, 정황도 훨씬 풍부해 보인다. 현재 우리 검찰의 입장이 1970년대 일본 검찰의 입장보다 여러 면에서 여건이 좋다는 얘기다. 우리 검찰의 분발을 기대한다.
정병진 상임고문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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