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죽지 않는다'

캐나다 출신 과학·기술 전문기자

20여년 간 디지털-사회·문화 파악

디지털 기술은 새로운 도구

기계는 저장, 인간은 가치판단

디지털 치매가 아니라 업무 분화

생각은 죽지 않는다 클라이브 톰슨 지음ㆍ이경남 옮김 알키 발행ㆍ456쪽ㆍ1만6,800원

당신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페이스북에 상태 업데이트 글을 올리고 있는 옆자리의 동료를 경멸의 눈초리로 힐끔거린다. 방금 먹은 음식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며 방실거리는 배우자를 보고 혀를 쯧쯧 차고 있을 수도 있다. 당신에게 인터넷은 우리의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는 동시에 비밀을 다 까발리는 판옵티콘이고, 어수룩한 자아도취의 퍼레이드이자 꼴불견의 대향연일 뿐이다. 트위터가 무엇인지를 140자로 정의한 이 문장-“나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도 너무 바빠서 네가 내 주의를 확실히 끌 만한 대단한 일을 벌이지 않는 한 너에게 신경을 쓸 수 없어. 물론 너도 마찬가지겠지만”(문예지 ‘엔플러스원’ 중)-이, 장담컨대, 마음에 들 것이다. ‘사람들이 말이야, 인류 지성의 총화이자 정수인 책을 읽어야지 말이야.’

캐나다 출신의 과학ㆍ기술 전문기자인 클라이브 톰슨의 ‘생각은 죽지 않는다’(원제 Smarter than you think)는 사회비평 분야에 널리 퍼진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드는 책이다. 확실히 이런 생각은 “예리하고 지적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지만”, 인류는 유사 이래 “언제나 새로운 기술에 훌륭히 적응했고, 옛 것의 장점은 그대로 유지했다.” 신기술의 등장에 항상 겁을 좀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뇌의 배선을 바꿔버렸고 인간 종의 특징이었던 사유는 이제 종말을 맞게 될 운명이라는, 니컬러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로 대표되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미안하지만 틀렸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상시 접속된 현재의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있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더 똑똑해지고 있다.

클라이브 톰슨의 책 '생각은 죽지 않는다'는 '인터넷이 생각을 좀먹는다고 염려하는 이들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도발적이지만 예의 바르고, 예리하지만 유머러스한 화법으로 적절하게 균형을 잡으며, 인터넷이 사유를 죽일 것이라는 종말론적 문화예언을 반박한다.

‘생각은 죽지 않는다’는 인터넷이 인간 정신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어떤 식으로 변화ㆍ확장시켰는지 치밀하게 분석하고 집대성한 거의 최초의 책이다. 뉴욕타임스와 와이어드에 기사와 칼럼을 쓰고 있는 저자는 디지털 기술과 그것의 사회ㆍ문화적 영향력을 파악하는 데 20여 년간 집중해 왔다. “이제는 실리콘밸리의 허상에서 풀려나 생활에 이미 뿌리를 내린 디지털 경험이 가져다주는 보상과 즐거움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아래, 통시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웅변술부터 구텐베르크 혁명을 거쳐 현재의 스마트폰 쇼크까지, 공시적으로는 아랍의 봄부터 중국 저링허우(1990년대생) 세대의 환경파괴 반대시위와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까지 두루 훑으며 디지털 시대를 낙관하는 근거들을 제시한다.

“새로운 툴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지까지 결정한다.” 이 책의 요지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바로 이 문장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전제에 기반해 디지털의 특징을 여덟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완전한 기억. 무한한 기억 용량을 가진 컴퓨터는 인간을 디지털 치매로 내모는 것이라기보다 ‘저장은 기계가 하고, 가치판단은 인간이 한다’의 업무 분화를 촉발했다. 일상을 기록하는 사람, 라이프로거(life+blogger)의 탄생은 무엇이든 기록하고 언제든 검색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가능케 했다. 인간은 정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잊지 않는다. 세부는 검색하면 그만이다.

두 번째 특징인 생각의 공개(public thinking)는 보다 중요하다. 이는 여덟 번째 특징인 연결성과도 맞물려 있는데, 유사 이래 인간이 이토록 자신의 생각을 공표하는 데 골몰한 적이 없었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1960년대의 진보적인 미국인들은 자기와 달리 남들은 흑인과 함께 거주하길 원치 않을 것이라는 그릇된 예단으로 역사의 진보를 막아왔다. 이른바 ‘집단적 무지’다. 하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인간은 행동에 나선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정치혁명과 기업쇄신의 촉매제가 되는 건 그래서다.

디지털이 인간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흔해빠진 탄식은 인터넷이 초래한 글쓰기 홍수를 통해 가장 강력하게 반박할 수 있다. 미국에서만 사람들은 매일 1,540억통의 이메일을 쓰고, 트위터에 5억개가 넘는 글을 올리며, 페이스북에 160억개의 단어를 쓴다. 우편제도가 발달한 1860년도에 미국인 한 사람이 쓰는 편지는 한 해에 평균 5.15통이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이렇게 많은 글을 썼던 적이 있는가. 물론 “무엇이든 90%는 쓰레기”라는 스터전의 법칙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그 ‘무엇이든’에는 인류 지성의 상징, 책도 포함된다. 이제껏 교육은 읽기에만 주력해왔지만 이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쓰기 위해서 읽고, 읽어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읽고, 써도 쓰는 사람에게 쓴다. 모든 사람이 작가고 모든 사람이 청중인 20세기초 블룸즈버리 그룹 같은 시대다.” 쓰기는 더 많은 인지적 노력을 요하고, 기억력을 향상시킨다. 쓰는 인간은 늘 읽기만 하는 인간보다 더 똑똑하다. “지금 우리는 읽고 쓰는 능력에 있어 그리스 문명 이래로 유례가 없는 혁명의 한복판에 있다.”

디지털은 새로운 문해력을 등장시켰다. 문해력이란 문자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지만 이제 ‘문자’에 해당하는 텍스트는 무수히 확장되고 있다. 카메라는 증강된 눈이며, 사진과 움짤, 동영상 캡처, 심지어는 검색이라는 행위 자체도 텍스트다. 신뢰도를 확인하고 파악해내는 능력- ‘이거 일베 아냐?’라고 출처를 의심할 수 있는 능력-까지가 문해력에 해당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비주얼 언어에 대한 인지적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페이스북에 날마다 올라오는 친구의 소소한 신변잡기는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하지만 긴 시간 축적의 과정을 거치면 흡사 점묘화법처럼 친구의 내면생활을 정교하게 설명해주는 그림이 된다. “어떻게 지냈어?” 같은 비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소거하고, 위기의 순간에 즉각 개입하거나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인식은 SNS 이전에는 불가능했다. “일상생활 위에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차원의 정보, 즉 초감각적 지각” 덕분에 인간은 사람의 내면과 기분을 읽는 기술을 그 어느 때보다 향상시키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과 컴퓨터 중 누가 더 똑똑할까 두려움을 품은 채 궁금해왔다. 다양한 조합의 체스 게임이 보여주는 바는 다음과 같다. “어느 쪽도 아니다. 더 똑똑한 쪽은 둘이 함께 손잡은 팀이었다.” 인간과 기술이 손을 잡고 협업할 때 가장 막강했다. “기술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중립적이지도 않다”는 멜빈 크란츠버그의 말은 다시 한번 인용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으며, 우리는 지금 생각보다 똑똑하게 기술을 이용하고 있는 중이니까.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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