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 출신 시인
동춘서커스·사카린 등
60가지 제품에 얽힌 추억
따뜻한 문체로 소환
우리나라 최초의 양산형 자동차인 포니가 등장한 건 1975년이다. 우리 고유 모델이라는 프리미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출시 첫해에는 국내 자동차 수요의 55%를 차지했고, 3년 후에는 76.7%로 늘었다. 그러나 출시 10년만에 단종된 포니는 이제 등록문화재 553호로 지정돼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하신 몸이 됐다.
2000년 10월 ‘자동차 10년 타기 운동행사’에 79년식 포니를 몰고 온 황판권씨를 보며, 전직 카피라이터 출신의 저자는 파평 윤씨의 관향(貫鄕)이 있는 경기 파주시 여충사 옆 ‘윤시중교자총(윤시중 말의 무덤)’을 떠올린다. ‘무덤을 만들어줄 만큼 고맙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면, 물건이나 짐승이라도 사람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깊은 정이 들어 애지중지하던 차를 폐차장에 보내본 일이 있는 이는 알 것입니다.’(372쪽)
‘고물과 보물’은 오리콤, LGAD 등을 거쳐 독립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던 저자가 포니를 비롯해 공병우 타자기, 당원, 락희치약, 삼중당문고 등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60가지 우리 브랜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윤제림이라는 시인으로도 알려진 그는 따뜻한 문체와 날카로운 사유로 20세기 브랜드가 품은 어머니와 어버지의 젊은 날,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불러낸다.
동춘서커스가 탄생한 건 1925년. 일본 서커스단원으로 활동하던 박동춘이 30여명의 조선인을 모아 ‘동춘 서커스단’을 일으켜 세웠다. 한때 250명이 넘는 단원들이 북적대던 그곳에는 악극이 있고, 코미디가 있고, 마술이 있었다. 뮤지컬에서 연극, 무용, 개그콘서트까지 소화하는, 요즘으로 치면 토털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다. 저자는 ‘동춘(東春)’의 시니피에에 집중해 봄날의 풍경을 찬찬히 더듬는다.
‘그 시절이 어떤 시절입니까. 허버트 강이나 박종팔, 홍수환 같은 권투 선수와 김일, 장영철 천규덕 같은 프로레슬링 선수들이 장안의 화제를 집중시킬 무렵 아닙니까. (…) 그것은 결국 온몸으로 세상을 밀고 나가는 일, 슬픔과 가난이라는 연료로 인생이라는 로켓을 쏘아 올리는 일, 슬픈 만큼 아름답던 이 땅의 봄 풍경이었습니다.’(98쪽)
당원(糖原)으로 대표되는 사카린은 여염집 밥상과 스님의 상차림이 별반 다를 것 없던 식생활에 혁명을 불러왔다. ‘아이들의 혀는 늘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기 일쑤’였고, ‘한 숟갈로 10만리터의 물을 달게 만들 수 있다는 그 가공할 파워와 저렴한 가격’으로 사카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회고다. 당원 하면 저자가 맨 처음 떠올리는 사람은 동화작가 정채봉이다. 너무 가난해 분유 값도 없던 신혼시절, 쌀죽을 묽게 쑤어서 분유 대신 아이에게 먹이려 하지만 분유에 길들여진 아이 입에 맞을 리가 없다. 그때 떠올린 물건이 바로 사카린. 사카린 탄 쌀죽을 받아먹고 자란 아이는 어느 새 자라 장가를 갔고, 정채봉 선생은 10여 년 전 하늘로 갔다.
10년 전 내놓은 책을 절반 이상 고쳐 다시 내놓은 저자는 책 앞머리에 “될 수 있으면 어리고 젊은 벗들의 손에 많이 들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썼다. 생각도 물건도 처음부터 새로운 것은 없음을 확인해 주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때를 벗기고, 먼지를 털고 보면 고물과 보물은 샴쌍둥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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