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12개 갖춘 작은 레스토랑
올 3월 아시아 베스트 27위에 선정
웹툰 '미슐랭스타'의 실제 주인공
"음식 갖고 장난? 결국 맛으로 승부"
최근 미식가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가 된 식당은 단연 ‘류니끄’다.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골목에 있는 테이블 12개의 이 작은 개인 식당이 3월 발표된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27위에 선정되는 ‘이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영국 외식전문지 ‘레스토랑’이 선정하는 이 리스트는 올해 3회째로, 순위제와 시상식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의 아시아 판이다.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한국식당은 지난해엔 청담동에 있는 임정식 셰프의 ‘정식당’ 하나뿐이었지만, 올해는 세 군데나 등재되는 쾌거를 이뤘다. 뉴욕 분점이 지난해 미슐랭 투 스타를 받으며 이미 국제적 명성을 얻은 정식당이 10위,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이 38위, 여기까지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하지만 오픈 한 지 3년 반밖에 안 된 신생 레스토랑, 그것도 35세 오너 셰프의 첫 레스토랑이 27위에 올랐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돌풍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규명하는 용례로 적합하다.
“프렌치 액센트가 강한 모던 퓨전 요리를 선보이는 젊고 야심만만한 셰프”라고 주최측이 소개한 류니끄의 류태환(사진) 셰프를 16일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선정 이후 다다음달까지 예약이 차 있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지만, 분주한 레스토랑의 키친 앞에서 그는 유독 순위에 관한 얘기는 하고 싶어하지 않아 했다. “순위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니까요.”
아버지가 시켜서 한 요리
부산 출신인 류태환 셰프는 일본 유명 요리학교인 핫토리를 졸업하고 일본 고급 일식집에서 경험을 쌓은 후 호주와 영국으로 건너가 서양요리 배웠다. 요리는 자본이 만드는 것이라는 걸 일찍 간파하고 좋은 셰프들이 많은 선진국의 대도시들로 옮겨 다녔다. “전통만 보고 고른다면 프랑스밖에 갈 데가 없고, 그건 올드한 생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런던의 미슐랭 3 스타 셰프인 고든 램지 밑에서도 일했다. 그렇게 요리 수행을 위해 떠돈 세월이 총 8년.
요리 입문은 늦었다. 군 제대 후 방황하고 있을 떄 “아버지가 시켜서” 했다. 작가나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했던 그는 청소년기를 예술의 언저리에서 맴돌며 보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두 해 전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해양학자였고, 작은 아버지는 지난달 사임한 류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이다. 할아버지는 서울대 치대를 나온 의사였다. 공부를 엄청나게 시키는 집안이었는데, 공부가 엄청나게 하기 싫었다. “가문의 불량품”이었던 이 집안의 장손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손을 꼭 잡으며 요리 공부를 하라고 했다. 밥 먹을 때 말고는 남자가 부엌 들어갈 일이 없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가정이었는데 의외였다. “당신도 요리가 하고 싶으셨는데, 당시는 천대받는 직업이라 못하셨대요.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거죠. ‘너 때는 달라질 거다. 가서 요리를 배워라. 대신 삼류는 되지 말고 일류가 되라’ 그러셨어요.”
요리라. 하기는 싫었지만, 딱히 대안도 없어 “이거라도 해보자” 하며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표독스럽게 배우고 익혀 11년 반 만에 아시아에서 27번째로 요리를 잘하는 셰프가 되었다. “그건 논란의 여지가 있죠. 자꾸 순위 얘기가 나오는 게 너무 조심스러워요. 저는 넘버원보다는 온리원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고요, 지금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 안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생각은 난다. 그의 요리는 “아버지와의 약속이자 헌정”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다면 물어보고 싶어요. ‘아버지, 저 잘하고 있죠?’ 칭찬은 못 받고 늘 질책만 받는 아들이었거든요. 그런 것 때문에 버텼던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요리를 사랑하진 않아요.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그의 주식은 아침엔 사리곰탕면, 점심엔 편의점 도시락이다. 오전 6시30분에 일어나 새벽 3시쯤 잠드는 생활이라 정작 자신에겐 배고프면 먹는 게 음식이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적도 몇 번이나 있지만, “셰프라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이라며 별 것 아니라는 투다. 그래도 재능이 없다면 여기까지 오진 못했을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부산 사나이의 ‘깡따구’를 말했다. 근성도 재능이다.
기본이 있어야 퓨전도 되는 것
류태환 셰프의 요리는 일본과 프랑스 요리를 기본으로 한 현대식 창작요리다. 이른바 컨템포러리 퀴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이브리드 퓨전이죠. 이것 저것 대충 섞어서 나오는 게 퓨전이 아니거든요. 근거 없는 퓨전보다 프렌치와 일본 요리, 기본과 기본이 합쳐져서 새로운 요리가 나온다는 게 제 요리의 근간이에요.”
류태환에 유니크라는 단어를 합쳐 2011년 가로수길에 류니끄를 오픈했다. “부산 촌놈이라 여기밖에 몰랐어요. 사촌동생이랑 한번 와봤는데, ‘와, 좋다. 무조건 여기에 해야겠다’ 싶었죠.” 사실 류니끄는 입지가 좋지 않다. 초행이라면 골목길 안쪽에 있어 좀 헤매야 한다.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절대 옮길 생각이 없다.
메뉴는 점심과 저녁 코스 각각 한 가지로 정해져 있다. 점심은 5코스에 4만5,000원, 저녁은 8코스에 12만원이다. 요리는 그야말로 ‘류니끄’하다.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아무즈 부쉬’는 화분에 유칼립투스 줄기를 꽂고 이파리에 치즈를 끓여 만든 과자인 튜일과 크랜베리 치즈를 발라놓은 월계수 잎을 붙여 내온다. 한 잎씩 떼서 먹으면 된다. 화분 위 자갈에 말린 청겨자 잎에 김파우더를 묻혀 허니 검과 함께 얹어 내놓는가 하면, 돼지감자 수프를 투명한 계란 모양의 유리용기에 담아 서빙한다.
류니끄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메뉴는 계절생선회. 요즘은 참돔과 고등어다. 검은 오석 플레이트 위에 석 점의 회를 올리고 오이로 만든 폼과 월계수 잎으로 만든 파우더 등에 찍어 먹는데, 오이, 당근 등 야채 피클과 석류 등 모두 15가지의 재료가 들어간다. 포크와 나이프 대신 의료용 핀셋으로 집어 먹는데, 플레이팅이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다. 아방가르드한 프리젠테이션과 퍼포먼스가 강한 요리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그의 요리를 두고 예술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재밌잖아요, 그렇게 먹으면. 처음엔 아무도 제 요리를 알아주지 않았어요. 음식 갖고 장난 친다고 욕하는 사람도 많았죠. 하지만 음식은 결국 맛입니다. 아무리 예쁜 요리도 맛 없으면 끝이에요. 제 요리는 예술이 아닙니다. 음식 하는 사람이 예술가라고도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음식이라는 건 한번 먹으면 끝인 일회적인 사건이지 기록이 아니잖아요. 철저히 상업이지 예술이 아니에요.” 50세가 되면 부산 바닷가로 내려가 글 쓰고 그림 그리며 사는 진짜 예술가의 삶을 살 계획이라서 “이런 걸 예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그는 말한다.
“스타 셰프라는 말 싫다”
류태환 셰프는 김송의 웹툰 ‘미슐랭스타’의 실제 주인공이다. 음식 감수를 맡고 있을 뿐 아니라 실명의 주인공으로 레스토랑과 함께 등장한다. 어릴 때부터 친한 형인 작가의 부탁으로 금전적 거래 없이 시작한 일이 커져서, 만화가는 대한민국 컨텐츠 어워드 만화대상 문화체육부장관상을 받고, 류니끄에는 만화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엄청나게 늘었다. 이 만화는 MBC가 드라마로 제작, 올 11월 촬영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는 스타 셰프라는 말을 싫어한다. 드러내지 않되 강하게 존재하는 삶을 지향한다. 요리는 비즈니스라 이름을 팔아야 할 때가 있었지만, 주목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방송도 정보를 전달하는 교양 다큐멘터리가 아니면 출연하지 않는다.
8가지 코스에 100여개의 식재료를 사용하는 고집 탓에 흑자 전환한 지는 이제 1년. 요리를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지만 직업정신은 지독할 만큼 투철한, 셀레브리티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스타 셰프인 것은 사실인 그에게 셰프란 어떤 직업일까. “고통과 치유의 반복, 그거 같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다가도 제 요리를 먹고 행복해하는 분들을 볼 때면 스르르 고통이 치유되거든요. 그분들께도 제 요리가 치유가 되었으면 하고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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