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박노수(사법연수원31기ㆍ49) 파산5단독 판사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담당 검사 중 한 명이었던 박상옥 대법관 후보의 임명을 비판하는 원고지 27장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렸다. 다음은 그의 글 전문이다. 관련기사 보기
=================================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근무하는 박노수 판사입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이 글을 씁니다.
지난 주말 국회방송 홈페이지에 들어가 4월 7일 국회에서 진행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의 전 과정을 시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저 자신이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박 후보자의 인사청문절차에 대해 도저히 그냥 있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래와 같이 의견을 표명합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는 박 후보자가 검사 재직시절 담당했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수사에서 박 후보자의 역할을 두고 극명하게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한쪽에서는 “은폐·축소를 방조 또는 묵인한 검사”라며 공세를 가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오히려 “안기부와 경찰의 은폐·축소 시도를 물리치고 고문경찰을 구속·기소하는 공을 세운 검사”라고 올려세우기까지 합니다. 박 후보자 본인은 “결과적으로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점은 송구스럽지만, 당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사건은폐에 관여하는 등 검사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처신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다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87년 6월에 있었던 민주화 항쟁은 우리 현대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일어난 그 항쟁의 힘으로 비로소 우리 사회는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방 이후 87년 6월 항쟁 전까지의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저버리고 무시한 독재사회였다면, 6월 항쟁을 통해서 얻어낸 대통령 직선제, 그 힘으로 전면개정을 이룬 87년 민주헌법이 시행된 이후에야 우리 사회는 비로소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고 돌보는 민주사회로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물꼬를 튼 것이 87년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그해 1월에 있었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그 6월 항쟁을 촉발시킨 사건입니다.
박 후보자는 당시 이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의 수사를 담당한 검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지금 그가 이 나라의 최고법관인 대법관이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모두가 말하듯이 사법부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이고, 그 중에서도 최종심인 대법원은 그 가치를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박 후보자가 일각의 평가처럼 “안기부와 경찰의 은폐·축소 시도를 물리치고 고문경찰을 구속·기소하는 공을 세운 검사”라면, 그런 분이 대법관이 되는 것은 모두가 환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다른 편의 주장처럼 “안기부와 경찰의 은폐·축소 기도를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방조한 검사”였다면, 그런 분이 대법관이 되는 것은 있어서는 아니될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대법관이 될 자격이 없음은 물론이고, 그런 분이 대법관이 되는 것은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이룬 우리 국민들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 후보자는 “은폐·축소를 물리치고 공을 세운 검사”가 아니라, “은폐·축소 기도를 알면서도 묵인 또는 방조한 검사”에 가깝다는 것이 이번 청문회의 전 과정을 보고난 저의 판단입니다. 그런 판단은 우선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직후부터 검찰의 1차 수사가 종료하기까지 사이에 있었던 아래의 객관적 사실들에 근거하여 있습니다. 아래에 나열하는 것은 제가 이번 청문회와 언론보도 등을 통해 당시의 객관적인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것들입니다.
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해, 즉 다음 정권의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해에 발생하였습니다. 그해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하자는 사회적 요구가 분출하던 상황에서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이어 새해 벽두부터 터져나온 고문치사사건으로 인해 정권은 곤혹스런 상황에 몰리게 되었고, 이를 반영하듯 당시 경찰 총수인 치안본부장은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말도 되지 않는 조사결과를 서둘러 발표합니다. 그리고 경찰은 사건의 진상을 덮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당시 검찰 책임자(정확히는 최환 공안부장과 그 지시를 받아 부검을 집행한 안상수 검사)의 제지로 경찰의 화장기도를 물리치고 부검을 관철시켜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라는 사인을 밝혀내기는 하였지만, 이렇듯 사건 직후부터 경찰의 조직적인 은폐·축소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진행된 아래의 경과들을 보면, 조직적인 은폐·축소 시도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② 부검에 의해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검찰은 사건을 공안부나 특수부가 아닌 형사부에 배당하면서 엉뚱하게도 ‘경찰의 명예회복 기회 부여’라는 명분을 내세워 직접수사를 포기하고 사건을 경찰의 자체 수사에 맡겨 버립니다. 이미 사건 직후 화장을 통해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고, 경찰 총수가 나서서 ‘쇼크사’로 거짓발표를 했던 그 경찰에 수사를 맡겨버린 것입니다.
③ 며칠간의 수사를 거쳐 경찰은 1월 19일 고문을 자백한 2명의 경관을 구속하고, 다음날인 1월 20일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면서 ‘경관 2명의 업무과욕에 의해 벌어진 우발적인 사고’라는 요지의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는 바로 이 시점, 즉 경찰이 이미 2명의 고문경관을 구속하여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기 직전인 1월 19일에 수사팀에 합류하였습니다.
④ 그런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의 수사는 겨우 4일간 진행되었습니다. 그것도 피의자인 고문경관들을 검찰청으로 불러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수감된 영등포교도소로 출장을 나가 조서를 받는 이례적인 수사를 하였습니다. 더구나 ‘과연 경관 2명의 과욕에서 비롯된 우발적인 사고에 불과하냐’ 아니면 ‘공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차원의 고문이냐’가 핵심적인 수사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필수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현장검증이, 당사자인 고문경관을 참여시키지도 않은 형식적인 실황조사로 대체되고 말았습니다(청문회에 출석한 최환 전 공안부장은 이와 같은 수사관례는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검찰은 1월 24일 경찰의 수사내용을 그대로 추인하는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2명의 경관을 기소하고 서둘러 수사를 종료하고 맙니다.
상황이 이러했는데, 당시 이 수사를 담당했던 박 후보자는 “수사를 하면서 어떠한 외압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과연 이 말을 사실로 믿을 수 있을까요?
자신이 수사팀에 합류하기 전에 이미 경찰 총수까지 나선 은폐·축소 시도가 있었고, 경찰에 의한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를 다시 경찰에 던져주었고, 그토록 중차대한 사건의 수사를 송치받은 날로부터 불과 4일만에 끝내도록 하고, 해당 피의자들을 검찰청에 부르지도 않고 현장검증에도 참여시키지 않은 채 서둘러 수사를 종료하고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는 윗선의 황당한 조치들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아무런 외압도 느끼지 못했고, 그저 최선을 다해 수사를 했을 뿐이다??
당시 박 후보자가 속한 검찰조직의 총수가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가동되고 있었고, 박 후보자와 함께 수사를 담당했던 안상수 전 검사는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정한 방침에 따른 윗선의 외압이 지속적으로 있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안상수 전 검사와 함께 수사를 담당했던 박 후보자는 그러한 외압을 전혀 몰랐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박 후보자가 수사팀의 말석 검사였다고 하지만, 단순히 안상수 전 검사를 보조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고문경관 중 1명을 전담하여 조사한 수사검사였습니다.)
결국 ‘당시 외압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박 후보자의 청문회 답변은 사실이 아닌 거짓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판단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정이 그와 같다면, 당시 박 후보자는 ‘경관 2명의 과욕에서 비롯된 우발적 사고’로 사건을 축소·마감하려고 하는 정권 핵심과 윗선의 의도를 알면서도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수사결과를 내놓음으로써 그들의 은폐·축소 기도에 협력하거나 순응하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즉,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과 정황을 종합할 때 박 후보자는 은폐·축소와 관련 없는 검사가 아니라, 은폐·축소를 묵인 또는 방조한 검사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 후보자는 ‘은폐·축소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으므로 대법관 자격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이 은폐·축소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해명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당시 수사기록의 열람과 검토를 제한하는 법무부와 검찰에 스스로 적극적인 요구를 해서라도 충분한 열람과 검토가 가능하게 하고, 여러 의혹에 대해서도 근거자료를 갖추어 충분히 설명과 해명을 한 토대 위에서 자신의 무관함을 주장하여야 하는 것이지, 지금처럼 그저 직접증거가 없다는 이유만을 내세워 무관함을 강변하여서는 결코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은폐·축소에 협력ㆍ순응한 검사라는 것이 추정되는 상황임에도 박 후보자가 자신의 무관함을 충분히 설명하고 해명함이 없이 대법관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있어서는 아니될 일입니다. 더구나 박 후보자가 당시 외압에 대항하지 못하고 순응했음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어떤 외압도 없었고, 검사의 본분도 다했다’라고 강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외람된 말씀일 수 있으나, 박 후보자가 당시 수사팀의 말석 검사로서 상부의 방침에 차마 대항하지 못하고 순응했다면, 그러한 처신을 상황적으로 이해 못할 것은 아닙니다. 저 자신도 이 글을 쓰기까지 자칫 이 글이 대법관 공백상태를 더 연장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여 제가 속한 사법부에 누가 되지 않을까라는 점 때문에 수십번을 생각하고 주저하였는데, 당시의 엄혹한 상황에서 검사가 조직 상부의 방침에 대항한다는 것은 자신의 직과 인생을 내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그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 후보자가 이 나라의 대법관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상황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은폐·축소하는 데 협력ㆍ순응한 검사가 6월 항쟁을 거쳐 탄생한 민주헌법 하의 대법관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절대 아니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외압은 없었고, 검사의 본분을 다했다’라고 강변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저는 이번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고나서, 과거 독재정권 치하의 고문치사사건 은폐·축소에 협력했던 검사가 은폐·축소와 무관할 뿐 아니라 은폐·축소 기도에 맞선 훌륭한 검사라는 거짓 휘장을 두르고 대법관에 취임할 것만 같은 절박한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부족함을 무릅쓰고 떨리는 마음을 겨우 다잡아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박 후보자는 스스로가 나서서 자신이 고문치사사건의 은폐·축소와 무관하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설명하고 해명해야 합니다. 만일 그럴 의지가 없다면, 이제라도 대법관 후보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