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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그분의 지당한 말씀

입력
2015.04.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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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1주년인 16일 오후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1주년인 16일 오후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배고프면 밥 먹어라’는 식의 기사는 쓰지 마라." 오래 전 한 회사 선배가 종종 하던 조언이다. 살아가는데 있어 꼭 필요하나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선 기사로 다루지 말라는, 요약하자면 뻔하고 뻔한 기사는 쓸 생각 말라는 뜻이었다. ‘잠 오면 잠을 자라’나 ‘목 마르면 물을 마셔라’ ‘외로우면 연애를 하라’ 같은 내용만을 담으면 공허한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덜 자고도 생활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 물이 아니고도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 호감 가는 이성(또는 동성)에게 다가가는 법 등을 다뤄야 독자들이 좋아한다는 선배의 지당한 말씀에 고개를 주억거리곤 했다.

신선한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좀 강해서일까. 일상에서 옳은 말만 늘어놓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광고를 보면 짜증이 슬며시 밀려온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화려하게 포장한 기업 이미지 광고를 볼 때 특히 그렇다. “희망은 빛나는 미래죠” 운운하는 한 은행광고를 볼 때면 “대출금리나 내려줘야 미래가 좀 빛날 텐 데”라는 반발심이 생기는 식이다. 새로운 금융기법을 개발해 다른 은행들과 경쟁할 자신이 딱히 없으니 ‘저희 은행 좋은 은행’ 식의 이미지 구축에만 매달린다는 나름의 논리가 이런 반발을 부추긴다.

그래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당연한 말들을 할 때가 있다. 회사 후배들에게는 “공부해서 전문성을 갖춰라”고 말하고, 대학생들에게는 “도서관에만 있지 말고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하라”고 간혹 짧게 조언한다. 하나마나 한 말이다. 해뜨기 전 집을 나와 달 밝을 때 퇴근하는 고단한 일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공부를 하라니, 공포의 취업전쟁을 앞둔 이들에게 한가하게 문화생활을 권장하다니. 그렇게 해법 없는 모범답안만을 제시하다 보면 소통 없는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너무나도 지당한 말들이 국가 지도자에게서 나올 때는 울화가 치밀다가도 바닥 없이 추락하는 느낌이 든다. 지난해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통일비용에 대한 우려와 북한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남북통일을 마땅치 않아하는 젊은 층이 늘어난 현실을 고려한 발언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문제는 해법이다. 진정 대박을 원한다면 김정은이라는 고약한 상대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전략과 행동이 따라야 한다. 오래 전부터 무구한 목소리로 간절하게 부르던 동요가 담고 있듯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대박을 넘는 간절함이 이미 국민 정서에 내재돼 있다. 맞설 상대가 엄연히 있고 대박을 내고 싶은 강한 의지가 있다면 남북대화 등의 구체적인 방법이 나와야 하는데 1년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 대신 “통일부장관은 누가 해도 된다”는 우울한 말만 들려왔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직후 유족들에게 했던 말도 마땅했으나 실천이 따르지 않으니 공허해졌다. “언제든지 유족들과 만나겠다”고 했으나 철저한 외면이 이어졌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여권 주요 인사들을 로비 대상으로 지목한 메모가 공개된 뒤 나온 대통령의 엄명도 너무도 지당하기에 맥이 빠진다.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엄정대처 해야 한다” “부정부패를 확실하게 뿌리 뽑는 정치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국민은 법과 원칙에 의한 수사 결과를 기대하지 구호에 가까운 지시에 환호하진 않는다.

당위론적 발언은 그나마 낫다. 간혹 대중을 현혹하는 광고보다 더한 말이 최고 지도자에게 나올 때 절망감이 더 크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발언은 “먹으면서 살 뺀다”는 허무맹랑한 다이어트 광고 문구를 접하는 기분이었다.

문득 대통령의 당연한 발언들을 되돌아보다 2012년 개봉한 영화 ‘아부의 제왕’이 떠오른다.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했으나 명대사 하나를 남겼다. “암요, 그럼요, 당연하죠, 별말씀을…” 관료들과 참모들이 대통령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고개를 조아리며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분 나쁜 상상까지 했다. ‘배고프면 밥 먹어라’식 대통령의 발언을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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