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사부님이 옳았다

입력
2015.04.14 15:01
0 0

13년 만에 사부님을 만났다. 그 양반은 내가 사부로 삼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모른다. 그런데 그 분 말씀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앗. 꼭 사부님을 두시기를. 서로가 몰라도 괜찮다. 인생에 사부님이 한 분쯤은 있어야 삶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 양반은 사랑을 가르치셨다. 2002년쯤, 그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고 그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아는데 3년이 걸렸다. 그 분은 그저 ‘사랑하면 알게 되고’ 라고만 붓으로 써 주셨다. 나중에야 성경의 말씀인 줄 알았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그 흔한 사랑을 몰랐다. 지금도 다는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다. 연애 얘기 아니다. 인생이 사랑이었다. 연극도 사랑이었다.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당신의 이야기에 빠져서 10년 넘게 잘 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익숙해졌고 나는 다만 말을 담고 살아갈 뿐 길을 내서 삶이 사랑의 전체가 되는 득도한 존재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러던 근자의 어느 날. 무슨 일을 꾸미다가 문득 그 분이 또다시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떠나지를 않았다. 사부님 없이는 도저히 그 일을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굳게 마음을 먹고 전화를 드렸다. 옛날 일곱 자리 전화번호라 연락이 안 되었다. 인터넷을 뒤져서 가까스로 연락처를 알아냈고 통화가 됐다. 중국집에서 만났다. 13년 만에.

고량주를 텄다. 그분은 옛날 보다 더 에너제틱해지셨다. 말씀을 하시는데 저어함도 없이 그저 확신에만 차 있었다. 옛날은 유도 아니었다. 그 동안 신학에 더 심취하셨다고 했고 이제는 별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도 하셨다. 대저 그래 보이셨다. 그 분의 말씀은 긍정 그 자체다. 내가 꿈을 꾸는 대로 이 우주가 나의 부모처럼 나를 도와준다는! 파주 광탄에 작업실을 차렸고 진입로에 아스팔트를 까셨단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 아스팔트를 뚫고 머위대가 나왔단다. 아스팔트를 뚫고 나올 수 있도록 우주가 머위대를 도왔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사부님의 말씀을 존경하니 순간적으로 홀렸다. 그러나 곧 이성을 차렸다. 그래 봤자 풀 따위가 적당한 환경적 요소와 맞아서 이미 깨진 틈을 뚫고 나왔겠지 그랬다. 맞다. 이치적으로 머위대가 아스팔트를 뚫고 나올 일은 만무다. 아스팔트가 먼저 금이 갔고 공교롭게 그 밑에 살던 머위대가 그 틈을 비집고 나온 게 맞다.

어제다. 황해도 만신으로 지내시는 분이 분 갈이를 하느라 집 앞에 고무들통 몇 개를 뒤집어 흙을 파서 뒤집고 계셨다. 문득 지나치다 들통에서 무엇을 힘겹게 뽑아내시는 것을 보았다. 나무 뿌리였다. 들통의 밑바닥을 뚫고 패기 좋게 번성한 뿌리! 그것이 어찌나 억세고 두꺼운지 쪽을 낀 백발의 노인께서는 여간 애를 먹고 있지 않았다. 취한 듯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놀라서 물었다. 그 뿌리가 고무 밑창을 뚫고 나왔나요? 하면서 자세히 보았다. 역시나 아니었다. 고무들통 밑창에 담배 직경만한 구멍 네 개가 뚫려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며 돌아섰다. 그리고 나서다! 몇 발을 옮기지도 않았는데 감동이 밀려왔다. 하늘로 뻗었다는 머위대와 땅으로 뻗은 그 만신댁의 장미나무가 모두 예사로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 봄의 기운이 만들어낸 놀라운 생명의 조화 그 자체였다.

사부님의 말씀이 또다시 떠올랐다. 맞다. 우주의 섭리가 빚어낸 놀라운 기적이다. 누가 봐도 깨진 아스팔트, 구멍 난 들통이다. 하지만 그 틈과 구멍은 이 우주가 만들어낸 조화이고 그 조화는 그 생명이 간절히 바랐기에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출구였다. 아닌가. 아니라면 머리 좋은 누구에게는 당연히 아닐 거다. 하지만 나는 그 놀라운 섭리에 동의하는 것이 사는데 이롭다는 결론에 훅 다다랐다. 기막히도록 사부님이 옳다. 바야흐로 봄이다. 봄이라서 꽃이 핀다고들 말한다. 아니다. 꽃이 봄을 원했기에 일어나는 기적이다. 아닌가.

고선웅 연극 연출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