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브랜드 유명 디자이너들 통 넓은 바지 일제히 선보여
평범 속 개성 드러내는 '놈코어'에 편안한 착용감과 복고 영향 분석
케이트 모스가 스키니 진이라는, 스타킹인지 바지인지 헷갈리는 블랙 진을 처음 입고 등장했을 때, 그게 세계적 유행 아이템이 될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직 성장이 덜 끝난 소녀처럼 삐쩍 마른 ‘스타일 아이콘’에게나 어울리는, 민간인 범접 불가의 패션 영역으로만 여겨졌으니까. 그러나 웬 걸. ‘입어보니 날씬해 보이더라’의 입소문을 타고 스키니 진은 쓰나미처럼 패션계를 강타, 국적과 연령을 불문하고 스타일의 기초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여성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 기사도, 다리가 짧아 보인다는 맹점도, 날씬하고 시크해 보이는 착시효과를 포기시키지는 못했다. 그게 무려 10년에 육박한다.
도무지 종식될 것 같지 않던 스키니 진의 독재가 마침내 명운을 다한 듯하다. 와이드 팬츠의 강력한 귀환이다. 매 시즌 런웨이 위에서는 다양한 스타일의 팬츠가 일당독재에 항거하며 새로운 스타일의 도래를 획책했지만, 매번 단발로 끝나고 말았다. 왔다는데 오지 않은 와이드 팬츠의 유행은 그래서 올 봄, 스타일을 다룬 많은 패션지와 외신 기사에서 ‘이번엔 진짜’(‘true comeback’ ‘for real this time’) 같은 문구를 빈번하게 동원하며 묘사되고 있다.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 셀린의 피비 파일로 같은 유명 디자이너들을 필두로 생 로랑, 구찌, 데렉 램, 발망, 톰 포드, 에밀리오 푸치, 코치, 이자벨 마랑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주요 패션 브랜드들이 일제히 다채로운 스타일의 와이드 팬츠를 선보이며 명백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하체를 옥죄는 스키니 진에 지쳤다!
이제는 다리가 길어 보이고 싶다
와이드 팬츠로 통칭되는 소위 통 넓은 바지는 범박하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허벅지부터 넓게 통으로 떨어지는 그야말로 ‘와이드 팬츠’와 허벅지 부분은 타이트하게 붙다가 무릎 아래 부분부터 넓어지는 ‘플레어 팬츠’다. 어느 경우든 확실한 장점이 있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보인다는 것.
와이드 팬츠는 허리선이 높냐 낮냐에 따라, 소재와 컬러, 길이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 하이웨이스트 라인은 몸의 곡선을 강조해 여성적이고 우아한 느낌을 내고, 로웨이스트는 리조트 패션의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직선으로 떨어지는 뻣뻣한 소재는 도회적이면서도 남성적인 느낌인 반면 부드럽게 몸에 감기는 소재는 여성미를 강조한다. 발목 위로 껑충하니 올라오는 크롭트(cropped) 팬츠는 발랄하고 경쾌하며, 땅에 끌릴 정도의 긴 길이는 흔히 글래머(glamour)라고 하는 화려하고 부티 나는 우아함을 살리는 데 최적이다.
작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모던 레트로’의 자장 속에서 가장 열렬하게 소환된 것은 1970년대 자유분방의 상징, 플레어 팬츠다. 70년대의 패션 아이콘 제인 버킨이나 프랑수아즈 아르디가 늘 입고 있던 나팔바지를 떠올리면 된다. 하이 웨이스트에서 시작해 엉덩이를 부드럽게 감싸며 내려오던 곡선이 무릎 아래를 향하며 메아리 치듯 벌어지는 이 팬츠는 여성의 몸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매직 라인으로 1970년대를 석권했다. 벨바텀(bell bottom) 팬츠가 정식 명칭이다.
하이힐, 하이 웨이스트, 긴 밑단… 성공적
와이드 팬츠를 입는 방법은 간단하다. 하이힐, 하이 웨이스트, 길게 내려오는 밑단이라는 3계명만 지키면 된다. 단, 이 셋은 황금의 트라이앵글처럼 맞물려 있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실루엣을 길게 뽑아내는 것이 이 바지의 사명이므로 평소 입는 바지보다 길이가 길어야 하고, 그러므로 마땅히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 높은 허리선 또한 이 사명에 복무하는데, 허리를 날씬하게 만들어주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두꺼운 벨트를 더하면 허리는 더욱 가늘어진다. 타이트하고 짧은 상의를 강조하는 건 잔소리처럼 들릴 테지만, 이게 없다면 와이드 팬츠는 한낱 ‘푸대자루’일 뿐. 뻣뻣한 소재의 흰 버튼 업 셔츠나 다양한 소재와 컬러의 크롭 탑을 매치하는 게 필수적이다.
와이드 팬츠의 복권은 평범함 속에 개성을 드러내는 ‘놈코어’(normal+hardcore)가 최근 패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덕분이다. 런웨이뿐 아니라 백화점 의류 매장과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옷걸이에서도 와이드 팬츠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일모직 여성복 구호는 전년 대비 와이드팬츠의 물량을 20% 확대했고, 기본 와이드 팬츠를 비롯해 배기팬츠, 부츠컷, 팔라초팬츠(치마처럼 보이는 통바지) 등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신원 여성복 비키도 전년 시즌에는 거의 선보이지 않았던 와이드 팬츠를 다양한 컬러와 길이로 선보이고 있다. LF의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최경원 상무는 “캐주얼라이징 경향이 심화되고, 편안함을 선호하는 대중들의 기호가 반영되며 최근 와이드 팬츠가 유행 아이템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며 “사회ㆍ문화 전반에 복고의 향수가 커진 것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와이드 팬츠의 기치 아래 모인 다국적 패션 디자이너들의 연합군 공격이 실제 스키니 진의 함락으로 이어질지는 사실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연합군의 등장에서 감지되는 하나의 분명한 욕구가 있다. 여성들의 내면에서 때때로 소용돌이치는 절규. ‘사는 것도 힘든데 바지까지 쪼이냐.’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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