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 외교비전, DJ 관점 같은 맥락
고래싸움 곁 새우 처지 벗자는 의욕
北 대화로 이끌 결단 없으면 무의미
내 고향 들판엔 어른 가슴높이쯤 되는 도랑이 많았다. 큰 저수지에서 들의 논으로 물을 대는 수로다. 이맘때면 도랑 양쪽엔 온갖 잡풀이 무성했다. 그 안에 풀어놓으면 겨우내 신선한 먹이에 굶주렸던 소는 긴 혀를 날름거리며 도랑 양쪽의 여린 풀잎을 싹둑싹둑 잘도 뜯어먹었다. 푸른 보리밭 위로 종달새가 하늘 높이 떠 종일 우짖는 때도 이즈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과 우리나라 외교의 비전을 설명하면서 ‘도랑에 든 소’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나 같은 시골 출신은 그 뜻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미ㆍ중 혹은 중일 사이에 처한 상황은 샌드위치나 넛크래커와 같은 불리한 제약이 아니다, 하기 나름으로 양쪽으로부터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라는 비관적 견해와 전혀 다른 적극적 시각이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통해 미중 양측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는 상황은 결코 골칫거리나 딜레마가 아니고,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주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올해 재외공관장회의 개회사에서다. 문맥상으로 DJ의‘도랑에 든 소’ 비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언론 반응과 국민여론은 싸늘했다. 지금 상황에서 웬 자화자찬? 기개는 가상하지만 현실이 정말 그러냐는 등의 질타가 쏟아졌다.
언급 시기가 좋지 않았다. 중국이 주도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막판 가입은 눈치보기의 극치이고, 사드(THAAD) 한반도 배치 문제도 미ㆍ중 압박에 좌고우면하기 급급하다는 비판여론이 비등했던 상황이다. 하지만 두 중대사안을 놓고 외교안보라인이 물밑에서 벌인 노력이 낱낱이 공개되지는 않은 만큼 평가를 유보하는 게 옳다. “패배주의적, 자기비하적, 심지어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우리의 역량과 잠재력을 외면한 무책임한 비판에 신경 쓰지 않고 뚜벅뚜벅 갈 길을 간다는데 밀어줘야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라인이 정말 우리의 지정학적 상황이 축복이 되도록 만들 역량과 잠재력을 가졌는지 판가름 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이란 핵 협상 타결로 세계의 시선은 북한 핵으로 쏠리고 있다. 핵비확산 전문가들은 이란 핵 협상 결과를 당근과 채찍, 대화와 협상에 의한 좋은 사례로 평가한다. 하지만 북핵 문제 해결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 견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상ㆍ하원을 상대로 이란 핵 협상 뒷마무리를 하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어 북핵 문제는 지금까지보다도 관심을 기울이기 어렵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북한은 북한대로 비핵화 협상은 여타 국가들이 비핵화됐을 때나 고려할 수 있다고 기세등등이다.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추가핵실험이나 장거리미사일발사 같은 도발을 하고 나설지도 모른다. 그리 되면 미국의 사드 한반도 배치 압박이 한층 강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중국과 북한의 대응에 따라 한반도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보게 어렵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는 우리의 지정학적 상황은 축복은커녕 저주가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북한을 대화와 협상의 무대로 끌어내야 한다. 6자회담이든 또 다른 틀이든 북한이 협상장에 나올 만한 동기를 제공하고 동시에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도록 강하고 유연한 체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현재 동북아 정세 구조상 그런 판을 까는 데 적극 나설 주체는 우리정부밖에 없다.
수순은 자명하다. 먼저 남북관계의 진전인데, 김정은을 대화 파트너로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를 인정하는지 아닌지 어정쩡하고 혼란스러운 태도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난번 칼럼(▶사드보다 부처님 손바닥)에서 얘기한 대로 김정은 체제를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관리한다는 자신감과 그런 틀을 만들어낼 비전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게 없이 지정학의 축복을 말하는 건 국민기망일 뿐이다. 도랑의 든 소도 한낱 뜬구름 같은 얘기가 되고 만다.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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