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가이길 거부한 마크 로스코展
단순한 색ㆍ작품 규모 조용한 압도
“어두운 조명, 그림과의 거리 45cm, 조용한 공간.”
미국의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가 전시장에 요구하는 조건은 까다로웠다. 그의 사후 작품을 보유한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는 고인의 의도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 조건은 예외 없이 지켜져야 했다. 그리스 신화를 그린 1940년대 작품부터 1970년에 그린 붉은 추상화까지, 로스코가 일생 동안 그린 작품 50점이 낮고 은은한 조명만을 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전시장을 채웠다.
마크 로스코 본인은 추상화가로 분류되길 거부하고 있지만, 그는 잭슨 폴록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 미술 작가로 꼽힌다. 노랑 빨강 보라 검정 등 뚜렷한 색채가 캔버스를 여러 개의 사각형 구획으로 나눠 점유한 작품은 얼른 보기에는 단순하고 심심해 보인다. 하지만 작품에 제목조차 달지 않을 정도로 설명을 배제한 로스코의 작품을 의자에 앉아 지켜보면 그 색채에 이끌려 짧은 명상의 시간에 빠지게 된다. 로스코는 그가 원하는 대로 “사람의 기본 감정, 예를 들면 비극ㆍ희열ㆍ숙명”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이끌어냈다.
로스코는 살아생전 상업적 성공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했고 자신의 작품을 본 관객들이 초월적인 체험을 할 수 있길 바랐다. 작품을 거는 조건이 까다로웠던 것도 그의 작품이 단순한 벽면 장식품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의도였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시그램 벽화’ 연작을 둘러싼 일화는 로스코의 자세를 보여준다. 뉴욕 시그램 빌딩의 레스토랑 ‘포 시즌스’에 30여점의 대형 유화를 장식하기로 했던 그는 돌연 계약금과 제작비를 포기하고 작품 인도를 거부했다. 속물적인 공간과 정면 대결을 펼쳐 사람들을 예술로 교화시키려 했던 로스코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의 결말을 본능적으로 예감했을 것이다.
뉴욕에서 튕겨나간 그는 휴스턴에 마련된 ‘로스코 예배당’에 초대형 작품을 설치해 작품과 관객이 조용히 대화할 수 있게 했다. 그가 원색에서 벗어나 그리기 시작한 검은색 계열의 작품은 온통 어둡고 답답하다. 그러나 그 어두운 느낌이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심연으로 정갈하게 가라앉힌다.
다만 예술의전당 전시장에 걸린 흥분한 듯한 작품 설명은 이 같은 로스코의 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로스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 그린 1970년작 ‘무제’는 마치 종교적 숭배의 대상처럼 전시돼 로스코 자신이 말년에 죽음을 예감하고 최후의 열정을 불사른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그의 말년을 다룬 연극 ‘레드’에 나오는 “(나의 작품은) 널 위로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야!” 같은 과장된 대사를 인용한 설명은 무대에선 멋질지 몰라도 전시장에선 민망해진다.
로스코는 “침묵은 (말보다) 정확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구체적 표현을 최대한 아끼고 거대한 작품 규모와 단순한 색 표현으로 조용히 관객을 압도해 왔다.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마크 로스코’같은 화려한 수식어도, 전시도록과 함께 출판된 철학자 강신주의 두꺼운 해설서도 불필요하다. 로스코의 작품은 그 자체로 보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전시 6월 28일까지. (02)532-4407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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