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사람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오해
사내에 성희롱 문제 제기땐 되레 부적응자로 낙인 십상
1993년 서울대 우 조교 사건으로 우리나라에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들어온 지도 20년이 넘었다. 직장 내 성희롱은 1999년 남녀고용평등법에서 고용상의 성차별로 불법 행위가 됐다.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이 확인되면 지체없이 가해자에 징계나 그에 준하는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에게 불리한 조치를 해서는 안 된다. 상시근로자 1인 이상의 모든 사업장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연 1회 이상 해야 한다. 성희롱이 사내 문제가 될 경우 일벌백계 차원에서 엄히 다루는 기업들도 많아지고 있다. “여자가 회식자리에서 술 따르고, 분위기 띄우는 건 당연했고, 대놓고 음담패설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던 과거(20년 전 제조업체 경리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40대 워킹맘)”와 비교하면 진일보하기는 했다. 증권·카드·보험·은행·캐피탈 등 68개 기업 노조가 속한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의 김금숙 수석부위원장은 “특히 금융권은 성희롱 문제가 불거졌을 때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기 때문에 노조에 접수가 된 사건 대부분은 사규나 단협 규정에 의해 가해자 징계 절차를 밟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성희롱을 야기하는 직장 내의 권력관계가 위계적으로 작동하는 조직문화가 그대로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고 말한다. 직장 내 성희롱은 과거보다 성희롱 언행의 수위가 낮아졌다손 쳐도 여전히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단지 대부분의 성희롱 피해자가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다. 2013년 한국팔로워십센터가 기업체 비서 16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성희롱 대응방식으로 회사 내부고발이나 즉시 사과요구, 경찰 신고 등 공식화한 경우가 24% 밖에 되지 않는다. 그냥 참거나(41.4%) 동료에게 털어놓는(34.5%) 정도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이 2011년 여성노동자 1,652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8.9%가 성희롱을 당하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상대방에게 직접 문제제기하고 사과를 요구한 경우는 열에 하나(11.2%)다. 상사나 사내의 고충처리기구에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거나(3.7%) 노조 등 사내 조직(2.6%), 여성단체 등 민간기관(2.1%)에 상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성에 대한 가벼운 말 정도라면 신경 쓰지 않겠고, 농담으로 잘 받아 칠 정도의 여유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워크넷’이 면접 시 “성희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여성 구직자가 받게 됐을 때 제시한 모범답변이다. 성희롱을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 사회, 기업들의 전반적 인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성희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은 지나치게 까탈스럽고 예민한 사람이나 조직 부적응자로 찍히는 사내 분위기, 불편해지는 관계, 업무상 불이익에 대한 우려로 적극 대응할 용기를 갖기가 쉽지 않다.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김모(31)씨는 “여자 동료가 회식자리에서 상사의 불쾌한 스킨십에 대해 ‘기분 나쁘다. 하지 말라’고 말 한마디 했다가 사내에 ‘이상한 여자’로 소문이 퍼지는 걸 봤다”며 “남자 직원들은 그 여자 동료와는 회식도 못 하겠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던졌다”고 말했다.
최근 물의를 빚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사태를 보면 꼭 남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성희롱 가해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상사의 삐뚤어진 권위의식과 위계적인 조직 문화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특히 중년 상사의 일방적 연애감정에서 비롯된 성희롱은 피해자 입장에서 더 혐오스럽고, 모욕적이다.
유명 사립대를 졸업하고 한 외식업체에 다니고 있는 김지현(29·가명)씨는 ‘지나치게’ 잘해주는 상사 때문에 고민이다. 지현씨는 예의상 상사인 한재석 부장(가명)의 말을 경청했고, 중간중간 리액션도 잘 했다. 한 부장도 그런 지현씨가 편했던지 맨날 저녁을 같이 먹자고 그랬다. “일을 잘하면 상(賞)으로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며 퇴근길도 따라 나섰다.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함께 퇴근하면서도 지현씨는 왠지 꺼림칙해 집 앞이 아닌 근처 지하철역에서 항상 내렸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퇴근길이었다. 갑자기 한 부장이 지현씨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 화를 내지도 못하고 손을 뿌리쳤다. 혹시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했는지, 다음날 출근해서 어떻게 그의 얼굴을 봐야 할지 고민으로 지현씨는 밤을 꼴딱 지샜다. “아버지뻘 되는 부장님이 설마 저를 여자로 볼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일본의 사회학자 무타 카즈에 오사카대 교수는 최근 그의 저서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에서 한 부장 같은 남자를 망상에 빠진 성희롱 가해자로 분류했다. 윗사람에 대한 예의와 존경의 표시를 남자인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제멋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다. 상사이기 때문에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을 마음이 있다는 신호로 생각하는 것이다. 무타 교수는 또 젊은 여성이 중년 남성을 이성으로 의식하지 않고 취하는 행동을 남성들은 종종 착각한다고 지적했다. 부하 직원이 성희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중년 상사가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모르고 그랬다”는 가해자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성희롱 판단 기준으로 피해자가 느낀 성적 혐오감 등 감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송은정 한국여성노동자회 노동정책국장은 “성희롱 피해자는 가해자와 일하기 싫어 회사 다니기도 싫어지고, 스트레스로 일의 능률이 떨어지게 된다”며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고, 말했을 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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