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더라도 세련되고 편안한 집
주거 트렌드 변화에 맞춰 취미생활 주제 260개 브랜드 참가
‘나는 독서와 음악감상, 가드닝이 취미다. 친구들을 초대하거나, 혼자서 조용히 티타임을 갖는 것도 좋아한다. 집에 서재와 오디오룸, 정원과 티룸을 모두 갖추어 놓은 것도 그래서다. 도대체 방이 몇 개나 되는지 궁금하다고? 원룸!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마시라. 영어단어 룸(room)에는 엄연히 공간, 자리라는 뜻도 있다. 저 많은 취미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원룸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88만원세대인 내겐 방 세 칸에 욕실 두 개짜리 아파트도 없고 앞으로도 계속 없을 예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해야만 하니까.’
내 집이 아니어도 꾸민다
올해로 21회째를 맞는 서울리빙디자인페어 2015가 ‘취미생활’을 주제로 서울 삼성동 코엑스 전시홀에서 열리고 있다. 사고 팔기의 반복을 통해 보다 넓은 집으로의 이사를 거듭하느라 집 꾸미기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던 과거의 부동산 활황이 사실상 종언을 고한 시대. 좁더라도 세련되고 편안한 집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국내 주거 트렌드가 급격히 변화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누리고자 하는 욕구는 내 집 마련의 꿈이 한낱 농담이 돼버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단단하게 뿌리내렸고, ‘전세집 인테리어’ ‘오래된 빌라 리모델링’ 등을 이 분야의 키워드로 부상시켰다. 저렴하지만 스타일이 살아있는 가구와 생활소품을 앞세운 무인양품, 이케아, 자라홈, H&M홈 같은 패스트 리빙숍의 폭발적 인기는 젊은 세대의 의식과 감성 속에서 집의 의미가 사는 것(buy)에서 사는 것(live)으로 확실하게 변화한 덕분이다.
260여개 리빙 브랜드가 참여한 올해 서울리빙디자인페어는 이런 추세를 반영해 큰 집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좋아하는 일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 연출에 초점을 맞췄다. 소품 시장의 폭발적 팽창을 반영하듯 공간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 취미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소품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실제 관람객들도 70% 이상이 20ㆍ30대 젊은이들이었다.
서재는 없지만… 북 레스트가 있다
스튜디오 ALB가 내놓은 북 레스트(Book rest)는 읽던 책을 펼친 채 걸어놓을 수 있는 일종의 책 거치대다. 서양에서는 간혹 찾아볼 수 있는 제품군이지만, 국내에선 처음 선보이는 아이템이다. 기능으로는 책갈피와 비슷하지만, 수납 및 인테리어 효과가 뛰어나다. 김서륭 스튜디오 ALB 대표가 키우는 유기견 ‘모리’의 이름을 따다 붙인 이 북레스트는 지난해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수출, 아트숍에서 판매되고 있다. 책 한 권 걸기에 딱 맞은 작은 사이즈부터 상부에는 잡지와 신문을 걸고 하단부에는 책을 수납할 수 있는 큰 사이즈까지 다양한 색상으로 출시돼 있다. 서재 없는 독서가들을 사로잡을 만한 아이템이다. 구식이 된 필름카메라 안에 전구를 넣어 멋진 오브제로 재활용한 이 브랜드의 카메라 램프도 공간을 크게 차지하지 않아 독서등으로 쓰기 좋다.
독서등과 수면등을 별도로 두기 어렵다면 ‘해야지’가 페어 기간에 맞춰 출시한 백자 모양의 램프 ‘도자’를 추천할 만하다. 달항아리 모양의 갓은 고무 재질이라 깨지지 않고, 터치 방식으로 조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실용적이다. LED 전구는 끄고 켜는 온/오프 기능밖에 없지만, 램프 안에 작은 LED 전구 10여개를 넣어 밝기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명품 오디오는 없지만… 나만의 사운드천국
음악 감상은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즐기는 가장 저변이 넓은 취미생활이다. 그래서 사운드는 ‘공간의 마지막 마감재’로 불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오디오룸은 언감생심. 오디오 자체도 고가지만, 소리가 진동할 수 있는 공간 자체를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페어에 등장한 많은 사운드 제품들이 복합기능으로 무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야마하의 LSX 시리즈는 램프와 스피커의 기능을 합쳤다. 램프 갓 모양의 스피커가 은은하고도 고급스러운 빛을 발하면서 어둔 밤 소리의 황홀경을 빚어낸다. 스마트폰을 통한 음악 듣기가 일상화한 세대를 위해 스마트폰 거치대와 스피커의 기능을 결합한 친환경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메이크에코’의 ‘스카이락’도 물건이다. 뿔나팔처럼 생긴 세라믹 거치대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놓으면 거치대 밑면의 구멍을 통해 들어간 소리가 울림통을 거쳐 나오는 무동력 스피커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없어도… 근사한 홈카페
밥보다 자주 먹는 커피와 차를 위한 아이템들도 주요 제품군을 이룬다. 에이프런(Apronn)이 특허 출원을 준비 중인 드립 스탠드 ‘폴스(falls)’는 커피 드리퍼를 상부에, 서버를 하부에 놓으면 분리와 결합의 번거로운 절차 없이 폭포처럼 커피가 떨어진다. 커피 추출 시 쓴 맛이 너무 강하게 나는 마지막 부분을 바로 옆의 다른 컵으로 옮겨 버릴 수 있도록 두 구짜리가 기본으로 디자인됐다.
식빵이 채소 등의 물기로 눅눅해지지 않게 해주는 토스트 홀더는 경원도예의 고경원 작가 선보인 창작품. 칸막이처럼 구획된 토스트 랙에 각각의 재료를 끼웠다가 먹을 때 합체하면 된다.
땅 한 평도 없지만… 나도야 도시 농부
도시 농부를 향한 갈망은 젊은 세대의 확실한 특징이다. 땅 한 평 없이도 가꿀 수 있는 미니 정원은 이번 페어가 보여준 또렷한 트렌드였다. 유리병 속에 작은 정원을 꾸미는 테라리엄, 천장에 매달아놓는 행잉 팟(hanging pot), 선반을 이용해 벽에 붙여두는 컵팟(cup pot) 등이 빈번히 눈에 띄었다. 화사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모종삽, 가드닝 전용 앞치마, 일조량 확보를 위한 인공 햇빛 플랜팅 램프(planting lamp) 등 관련 소품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전반적인 제품의 가격대는 결코 낮다고 볼 수 없지만, 일상의 기쁨을 위한 작은 사치에는 과감한 게 이 세대의 특징이다. “좋은 물건은 생산자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만들어진다.” 디자인 소품 브랜드 밀리미터 밀리그램이 전시 벽면에 적어놓은 이 선언은 88만원세대의 원룸 속으로 들어온 취미공간에 더 없이 잘 어울린다. 전시는 5일까지.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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