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일이 다가온다. 황사가 몰려온다. 1872년 네브레스카주에서 시작되어 일제강점기에 우리에게 시작된 이 기념일이 한국사회에도 뿌리를 내린 것도 꽤 되었다. 오존층이 빠르게 녹아나고 이맘때쯤 몰려오는 황사 때문인지 올해는 나무를 아끼자는 광고와 포스터가 자주 보인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아기나무와 꽃씨들을 들고 산으로 갈 것이다. 디지털 생태계로 들어가 산림욕을 기대하기는 어려운가 보다.
예쁘고 잘생긴 나무들은 모두 베어가고 못생긴 나무들만 남아서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새삼스럽게 나무의 소중함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글을 쓰고 책을 짓는 일을 하는 내 경우 나무와는 꽤 친화력을 가꾸어 왔다. 읽고 쓰고 산책하는 일은 모두 나무의 상상력과 닿아 있다. 종이가 된 나무속에서 인간이 내려놓은 행간을 읽고, 나무 위에 인간의 무늬를 입혀 책을 짓고, 그걸 판 돈으로 밥을 짓고 식솔들의 먹이를 나른다. 또한 나무가 숨을 쉬는 숲으로 가서 다급한 인간의 호흡을 연명하는 일이 산책이다. 한 마디로 작가에겐 나무와 이어진 줄을 놓는다는 것은 생명줄을 놓는 것과 다름없다.
노트북이 익숙하지만 아직까지 초고를 쓰는 연필도 나무다. 나는 책상에 앉아 나무로 된 그 연필을 쥐고 흑심을 품는다. 내가 연필을 쥐고 품은 대부분의 흑심은 나로부터 세상으로 건너가고 싶은 마음의 결들이다. 언젠가 ‘연필의 간’ 이라는 시를 한편 쓴 적이 있다. 내가 쓰는 연필의 간이 나처럼 약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연필과 내가 서로 건강하자는 생각에서 쓴 시였다. 연필의 간까지 걱정하는 자가 작가라면 좀 우스운가?
서가의 책들도 나무들의 향연이라 할 만큼 다양한 수종들의 그윽함을 갖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나무의 유전자를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악사들에겐 오래된 나무로 된 악기 속에 나무의 유전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믿음이 있다.
최근엔 목수를 몇 가까이 알고 지내는데 이들에게 듣는 나무 이야기가 흥미롭고 감동적일 때가 많다. 그들은 하나같이 디지털 환경 안에는 인간의 들끓음은 많지만 인간의 숨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나무의 숨을 죽이지 않고 목수들은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든다. 나무의 호흡을 그대로 살려서 인간계에 이식해주는 일이 좋은 목수의 기질이다. 목수들은 나무가 숨을 쉰 흔적을 결이라고 부른다. 목수들은 나무에게서 인간에게 그 결을 이어준다.
목수들은 가구를 만들 때 옹이를 빼내거나 파버리지 않는다. 나무가 살아온 무늬가 흘러가고자 하는 방향을 그대로 살려주는 길이 좋은 가구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좋은 바람을 마신 나무는 분명 좋은 집이 되거나 훌륭한 가구가 될 것이다. 목수는 작업을 하면서 나무가 마신 바람을 상상하는 사람이다.
나무가 악기가 되거나 책이 되었을 때 가장 가치 있게 쓰인다는 말은 인간들의 생각이다. 전에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죽어서도 나무의 가치가 보존되고 나무들의 DNA를 잊지 않고 사는 길이 귀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무는 제 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좋다. 산림욕이 나무가 숨쉬는 그 길로 찾아 들어가 우리의 숨을 섞는 일이듯이, 인간 가까이 나무를 옮겨오는 것보다 나무 속에 인간이 섞여 살아야 한다. 좋은 나무의 결을 책으로 옮기고 악기를 만들고 가구를 만드는 것보다 나무의 상상력이 제자리에 있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몫이다.
못생긴 나무들만이 남아서 산을 지키는 일이 우리가 하고 있는 전쟁이 되지 않아야 한다. 목수가 나무의 결을 지키는 일을 일평생으로 삼듯이 나무가 자신의 나이테를 하늘로 올려 보내는 오래된 목숨을 지켜보는 것이 자연사의 오래된 화두가 되어야 한다.
나무가 주는 호흡에 우리는 목마르다. 식목일이 다가온다. 나무의 유전자를 어디에 심어야 할 것인가? 일단 이 땅의 가뭄엔 나무의 상상력을 심는 일이 먼저다.
김경주 시인ㆍ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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