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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검정 무력화"… 정부 입맛대로 언제든 수정 여지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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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검정 무력화"… 정부 입맛대로 언제든 수정 여지 남겨

입력
2015.04.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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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제목 수정… 재량권 범위"

집필자 재량보다 교육부 재량 무게

학계 "교과서를 국정화 하라는 것"

'정권 사관이 正史' 인식 강요될 수도

금성출판사, 두산동아 등 7개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로 구성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 협의회'가 2013년 9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교육부의 교과서 수정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금성출판사, 두산동아 등 7개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로 구성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 협의회'가 2013년 9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교육부의 교과서 수정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2일 서울행정법원이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교육부의 수정명령은 적법하다”고 판결하면서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정부의 교과서 내용 개입이 더욱 노골화 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법원이 판결을 통해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교과서나 그 내용에 대해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현 교과서 검정체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앞으로 정부 의도에 맞는 내용만 교과서에 기술될 것이라는 걱정도 쏟아졌다.

이날 판결은 교육부가 지난 2013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친일ㆍ우편향 논란이 불거지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대해 내용 전반을 재검토하고 리베르 출판사를 제외한 7종에서 41건의 내용에 대해 수정명령을 내린 것이 과연 정당한 조치인지에 관한 것이다. 교육부는 당시 수정명령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해당 교과서의 발행을 정지하겠다고 통보했고, 이에 집필자들은 지난해 12월 “교육부의 수정명령은 도를 넘어 특정사관의 반영을 강요하는 것”이라며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었다. 학계에서는 당시 교육부의 조치가 한국사교과서 전반에 대한 수정명령이 거의 채택되지 않은 교학사 교과서를 살리기 위한 구색 맞추기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이미 검정을 거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에는 검정 절차상의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2013년 대법원 판결을 인용해 “교육부의 수정명령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가 약 8개월간 진행된다는 점에서 교육부의 수정명령을 따르기에는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이날 행정법원은 약 2주 동안만 진행된 교육부의 교과서 수정심의회 심의절차에 대해 “비록 완전히 동일한 절차는 아니더라도 ‘검정 절차상의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에 준하는 절차’에 해당된다”고 인정했다. 또 총 41건의 내용과 제목 등에 대한 교육부의 수정명령에 대해서도 모두 “수정의 필요성이 있는 사안들에 대해 피고의 재량권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며 하자가 없다고 봤다.

이에 대해 교과서 집필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집필자의 재량보다 교육부의 재량을 더 인정한 판결이라며 검정체계가 무용지물이 됐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준식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장은 “판결에 따르면 교육부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수정심의회를 구성해 내용에 개입하고 수정할 수 있다”며 “검정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자 교과서를 국정화 하라는 것과 다름 없는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하일식 연세대 교수도 “언제든지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교과서 내용에 간섭할 수 있다는 법적 승인을 교육부에 부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수정명령이 가장 이념 논쟁이 큰 근현대사 부분에 집중되고 이를 법원이 인정하면서 정권의 사관만이 정사(正史)라는 인식이 강요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수정권에선 보수사관이, 진보정권에선 진보적 사관이 정사가 되면 결국 다양한 시각이 제한된 일방적인 내용들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6종에 내려진 수정명령은 광복 이후 정부수립과정, 통일 논의 중단의 원인, 박정희 정부의 국가관,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천안함 피격 사건 등 대부분 근현대사와 관련됐다. 예컨대 ‘미래엔 교과서’에 기재된 ‘피로 얼룩진 5ㆍ18 민주화 운동’,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다니!’ 등을 소제목으로 부적절하다며 용어를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다’, ‘극단으로 치닫는 강압정치’로 바꾸라는 식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과서 집필자는 “수정명령이 대부분 ‘이것 넣고 저것 빼라’ 혹은 ‘이 부분 분량 늘리라’는 식이기 때문에 학자들의 관점을 제약할 수밖에 없다”며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정부의 교과서 내용 개입이 다른 과목에도 영향을 미쳐 궁극적으로 천편일률적인 교과서가 나올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준식 정책위원장은 “지금도 일부 경제교과서를 보면 기업만이 국익을 대변해왔고, 국가이익을 위해서 서민의 이익을 무시해도 된다는 식의 서술이 있는데 앞으로는 이런 추세가 더 강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정부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교과서를 수정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역으로 교육의 중립성을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4월 국회에서 시행령으로 되어 있는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을 법률화해 정부가 임의로 교과서 내용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방안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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